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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까레리나

사랑, 그 쓸쓸함에 관하여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명작에는 <전쟁과 평화>, <부활>, 그리고 <안나 까레니나>가 있다. 러시아 작품을 만나게 된 건 톨스토이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후 두 번째이다. 워낙 방대한 양으로 이뤄진 내용이라서 책으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영화로 <안나 까레리나> 읽게 되었다.

이 겨울, 기차를 타고 눈꽃이 펼쳐지는 광활한 모스크바와 생텍즈부르크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미지의 세계로  꿈꾸며 달리는 기차였다
 
주인공역을 맡은 키이라 나이틀리, 그녀는 <비긴 어게인>, <러브 액츄얼리>, <오만과 편견>의 영화를 통해 내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던 여배우 중 하나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에 대한 매력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었다. 상대 배역인 애런 존슨은 처음 알게 된 배우인데 모스크바 역에서 안나와 그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빛에 나도 완전히 꽂히고 말았다.
하얀 피부에 금발과 콧수염 그리고 그윽하고 깊은 눈빛은 마성 그 자체였다. 180의 키에 하얀 장교 제복이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던 안나에게 그는 신선한 오아시스였고  탈출구였다. 그 떨림을 나도 알 것 같다.
 
안나 까레니나는 러시아 귀족의 아내로서 결혼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던 중 모스크바 역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불꽃같은 사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지금의 삶과 다르지 않은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스토리이다. 그저 불륜이라는 틀에 맞추어 본다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이야기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불륜은 금기시된 사랑이고 사랑으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곡예사 같은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이런 사랑이 종종 영화와 소설로 희화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나 까레니나는 이 시대 우리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여자다워야 한다. 남자다워야 한다. 뭐뭐 다워야 한다 라는 사회적 사슬을 과감히 풀어내고 입고 있던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버린다. 그러면 절대 안 되는 법을 어긴 것과 같은 행위였다. 가진 것을 다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귀족으로 우아하게 파티나 즐기며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어찌 보면 모든 여성이 원하고 꿈꾸는 삶일 수도 있다. 유모가 아이를 키워주고 하녀들을 부리고 그저 내 미모만을 가꾸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아홉 살 아이의 엄마였지만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반면 그의 남편은 아내의 부도덕적인 배신을 모르는 척하기도 하고 알려질까 두렵다. 아내와 브런스키까지 용서하며 끝까지 그의 귀족의 자리를 지켜내려고 노력한다.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했던 안나와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내는 그저 허수아비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의 눈물겨운 용서가 아내를 사랑해서라면 더 좋았을 텐데.

결국 안나는  괴로움에 자살을 선택하고  비극적인 사랑으로 끝이 나버린다.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삶은 각자 다르고 그것을 누군가가 뭐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답 없는 질문에 골몰하게 되듯 ‘어떤 것이 도덕적인 삶인가’라고 의문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서 떠나는 것을 비도덕적이라고 재단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랑 없는 삶을 지속해야 옳은 것인가.  또한 귀족의 옷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그의 남자를 용서하고 그 아이까지 키운 남편을 도덕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위선적 폭력이다.  안나의 선택이 비윤리적이라 해도 숙명까지 거스르며 사랑을 택한 여인을 비난 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부조리 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차는 저 멀리 떠나고 사랑, 그 쓸쓸함만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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