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을 싫어하여 추워질 때면 쨍한 여름나라로 훌쩍 떠나곤 했는데,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에 따뜻하고 훈훈한 온기가 있는 분위기가 제일이라 크리스마스시즌에는 여름나라로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여름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것도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호텔 로비에 나가게 되면 일랑일랑 꽃냄새, 특유의 아로마 오일 냄새가 은은하게 코 끝을 자극한다. 동남아 국가를 가게 되면 특유의 향을 느낄 수가 있는데 캄보디아의 향은 또 옆나라 태국과는 다른 향이다. 나는 특유의 이 냄새를 참 좋아했다.
날씨는 푹푹 찌고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씨이지만, 호텔 로비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즐비했고 길거리를 지나갈 때도 마찬가지로 야자수 나무에 전구 등을 달아놓은 장식을 볼 때면, 이런 여름의 크리스마스도 괜찮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꽤나 씁쓸했지만 곧장 1불이면 먹을 수 있는 생망고스무디에 2불이면 먹을 수 있는 당도 가득한 망고 1kg은 그러한 생각을 잊고 현재를 집중할 수 있었다. 여유를 즐기는 것도 잠시 선베드에 누워 망고주스를 마시면서 수영이나 탱자탱자하고 지내면 좋으련만 늘 호텔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캄보디아 씨엠립은 앙코르와트가 있는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식당과 쇼핑센터는 나가면 곧잘 이용할 수 있었는데, 장기간 생활하려면 바로 의식주 중의 '주' 집이 필요한 것이다.
페이스북은 하지도 않았었는데 나와있는 매물을 보기 위해 siemreap real estate를 열심히 검색해 서치 했다. 처음에는 위치가늠도 어려워 열심히 구글맵을 보며 후보군을 줄여 나갔다.
유일한 교통수단인 툭툭이를 타고 흙먼지 잔뜩 일으키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매물이 나와있는 집 하나하나를 살펴본다. 옆나라 태국이나 베트남에서는 곧잘 고층 아파트를 볼 수 있었는데, 이 동네에는 높아봐야 맨션정도의 높이였다. 정말 높아봐야 5층이었다.
씨엠립에서의 살 집을 구하는 나의 최소한의 조건은 아래와 같았다.
1. 침실과 주방은 분리되어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 나는 처음에 음식이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집에서 요리를 해 먹으려고 했다. 꽤나 한인마트가 잘 되어있었고, 외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각종 세계 요리재료들을 쉽게 공수할 수 있었던 환경 탓에 이런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2. 집주인의 신원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
씨엠립은 관광도시이다 보니 메인 스트릿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꽤나 씨엠립 안에서도 고위층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집주인의 신원이 명확하다는 것은 치안이 안좋은 나라에서의 필수조건이었다.
의사소통에 있어 나는 캄보디아어(끄메르어)를 '섭섭하이'외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기에, 영어로 무조건 의사소통이 되었어야 했는데 영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집주인 이어야 하기에 이 부분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3. 합리적인 월세
우리나라는 매매, 전세, 반전세, 월세 등 다양한 거래형태가 있지만, 씨엠립이 외국인이 주거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딱 2가지이다. 매매와 월세. 매매 또한 외국인의 신분으로 바로 살 수 있는 루트가 꽤나 복잡하여 생각하지도 않은 방법이라 나는 합리적인 월세를 찾아 나서야 했다. 가격대는 다양했지만 아무래도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 돈을 더 지불해서라도 메인스트릿에 있는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서도 입지의 중요성이 발현되었다. 늦은 밤이면 정말 누가 잡아가도 모르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때문에 좋은 위치의 괜찮은 월세의 집을 찾아 나서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정말 만국공통인가보다.말 그대로 집의 컨디션은 '돈 따라간다'라는 말이 딱 맞았다.
결국 나는 월세 400불의 집과 타협을 하게 되었다.
나름 캄보디아 특유의 분위기에 한국에서 들고 온 새침구를 펼치니 나쁘지 않았다.
지금 아니면 이때 아니면 언제 이런 곳에 살아보겠어 라며 긍정마인드를 장착했다. 나름 30도가 넘는 이 나라에 에어컨을 내맘대로 켤 수 있었고, 꽤나 식당이 잘 되어있어 여기있으면서 살이 찔 정도로 세계 각국의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들은 다 가봤다.
그러나 가끔 우기철에 정전이 꽤 자주 되는 바람에 도피처치고는 70년대로 돌아간것만 같은 꽤나 시대에 맞지 않는 혹독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가끔 한국의 첨단 문물이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느려터진 인터넷에 노트북을 켰다가도 다시 노트북 커버를 쾅 하고 덮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몸은 타국에 있지만 아직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나는 이방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