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 중에도 비장한 마음으로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와글와글 변하던 디지털 화면 속 숫자가 ‘도로로롱!’ 하는 소리와 함께 고정되었다. 다행히 전날보다 몸무게가 줄었다. 훅훅 내려가면 좋겠건만 조급한 마음을 체중계가 알 턱이 없다. 이렇듯 내가 갑자기 매일 꼭두새벽부터 안달복달하게 된 것은 약 한 달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차분한 햇살이 나른하게 교정에 내려앉던 어느 오후였다. 아침부터 발생한 여러 사안을 보고하기 위해 중앙 교무실로 향하던 중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K와 마주쳤다. 올해 초 전입해 온 K,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한 외모와 마른 체형이 돋보이는 그녀에게 내용을 전했다. ‘선생님, A가 B랑 싸웠고 C는 화가 났고 어쩌고 저쩌고...’
K가 찬찬히 이야기를 듣더니 명쾌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A, B와 상담하고 C에게 훈계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세요.’
조언을 듣고 나니 속이 뻥 뚫릴 것 같았다. 후련해진 마음으로 인사를 하려는 찰나, K가 불현듯 커진 눈으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선생님, 살쪘죠? 살찐 거 맞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대답을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동 반사처럼 뚝딱뚝딱, ‘맞아요. 살쪘어요.’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K의 낯빛이 환해졌다. 그러더니 방탈출 게임에서 어려운 문제의 답을 맞힌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네, 그전엔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선생님 진짜 살쪘다!’
사실 나도 근래 체중이 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건 스스로가 더 잘 안다. 그렇지 않은가? 그저 남들이 몰라주기를 바랄 뿐이지. 안 그래도 그 전날, 꾸역꾸역 입고 간 바지가 온종일 나를 조여대던 터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엄마한테서도 들어본 적 없던 말을 직장에서 듣게 되다니!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핑계를 굳이 대자면, 작년 연말부터 어수선한 시국으로 속에서 천불이 날 때마다 맥주를 들이키며 분을 삭였다. 기쁜 소식이 이어지면? 또다시 축배를 들었다. 맥주 네 캔을 만 원에 파는 24시간 편의점은 현관문을 열고 앞 구르기 두어 번만 하면 닿을 거리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온 우주가 나를 도운 셈이었다. 배가 볼록 나오도록, 살이 폭폭 찌도록.
결국 나는 ‘내가 살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인식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요즘 유행한다는 메타인지 경험인 걸까? 그리하여 곧바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그동안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았던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16시간 공복, 물 많이 마시기, 과음 금지, 땀나도록 걷기. 그렇게 한 달을 보내자 체중은 내려갔고, 꽉 끼던 바지도 헐렁헐렁해졌다.
방학식 날 K에게 한 학기 동안 고생이 많으셨다는 인사를 전했다. K가 살이 빠진 나를 알아보며 다시 한번 놀라기를 내심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에 띄게 겉모습이 달라지진 않아서일 것이다. 나는 지난 한 달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음식을 씹을 때마다, 달리기를 할 때마다, 한 달 전 그녀와 나 단 둘만이 서 있던 고요한 복도에서 나눈 대화를 내내 곱씹었다고.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K는 그동안 살을 빼고 싶어도 게으름에 멈춰 있던 나를 움직이도록 큰 그림을 그려준 것 같기도 했다. 그 덕분에 나는 한 달간의 고군분투를 끝내고 가뿐해진 몸으로 한여름을 맞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기쁜 마음에 고마움을 전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어쨌거나 해피엔딩이니 다행이다. 그렇게 K에 대한 서운함은 사라지고(약간 남았고) 성취감만 남은,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