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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15. 2024

[소설] 이루다 4  연약한 인간을 위한 완벽한 시스템

파멸한 세계에서

시청 대강당에 모인 아이들은 경쾌하게 움직이는 피아노 주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피아노가 내는 물방울이 퐁당거리는 청아한 소리, 소녀의 모자를 데리고 달아나는 봄바람 소리, 멈추지 못해 쩔쩔매는 딸꾹질 소리에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마법처럼 움직이는 건반을 보겠다고 서로 밀치다가도 피아노가 방귀 소리를 내면 손뼉을 치며 웃느라 조금 전에 대립은 금방 잊었다. 음악을 느껴보는 행복한 아침이었다.


9시 10분 전, 자리에 앉으라는 안내 방송이 반복되었다. 삼삼오오 이웃과 모여 얘기하던 어른들은 자리로 돌아오는 아이들을 챙겼다. 재이에게 이끌려 온 막내도 한 씨 부부 사이에 내던져졌다. 막내는 한껏 꾸민 제 엄마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교양 있는 표정으로 받는 게 우스워 킥킥거렸다.


“축하해요! 샌이 파키오에 가게 되어서 정말 기쁘시겠어요. 너무 부러워요.”

“샌이 안 되면 누가 되겠어요? 저렇게 곱고 고운데요. 누군가의 전폭적인 지지로 그간 루다가 좀 분수에 안 맞는 성적을 받긴 했어요. 이번에는 공정한 심사가 되어서 잘 되었지 뭐예요.”

“맞아요. 이게 전폭적인 지지보다 두루두루 지지를 얻는 게 더 가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아유~ 어쩜 저리 예쁜지. 우리에게도 비법 좀 공유해 줘요. 우리 애 내년에 심사받잖아요.”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는 간질거리는 인사치레에 한 씨 부인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축하드려요. 우리 민우가 똑 부러지는 샌과 함께 가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아직 어린데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데 홀로 적응할 거 생각하니 걱정이 앞서네요. 서로 의지하면서 지내라고 할게요.”

아들 바라기로 유명한 민우 엄마는 눈물부터 찍어 냈다.

“어머, 민우도 축하해요. 올해의 신랑에 민우가 뽑혔죠? 이런 경사가 어디 있겠어요! 휴. 그런데 희한하게 올해는 ‘올해의 신부’가 없다네요. 그래서 우리 샌은 이주만 해요. 가서 좋은 신랑감을 찾아야 할 텐데…….”


“이렇게 좋은 날 무슨 걱정들이 많으신가요! 민우는 다정해서 파키오 가서도 인기 많을 거예요. 분명 좋은 집안과 맺어질 거예요. 민우가 또 얼마나 효자예요? 그곳에서 잘 정착하면 가족도 초대할 수 있다잖아요.”

민우 엄마 옆에 있던 여자가 말을 끊고 분위기를 민우 엄마 쪽으로 돌렸다. 주변 사람들이 이번에는 너도나도 민우 엄마에게 한 마디씩 축하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의 관심이 민우 엄마에게 쏟아지자 한 씨 부인은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모두 착석하라는 안내 방송이 한 번 더 나온 후 강당은 암전 되었다. 무대 위로 조명이 켜지고 맑고 청아한 음악이 잔잔하게 흘렀다. 

“안녕하세요. S시 여러분. 이렇게 이제 막 성인이 되는 첫걸음을 내딛는 우리 아이들을 축하해 주러 오신 부모님들과 가정에서 실시간 영상으로 함께 해주시는 시민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이 입장합니다. 모두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세요.”

입장하는 통로를 따라 조명이 켜지며 한 명 한 명을 비추어 주었다. 남녀가 짝을 이뤄 두 줄로 맨 뒤에 앉는 순서부터 입장했다. 시에서는 생애 가장 아름다운 청춘의 첫 순간을, 집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운명을 맞이할 첫걸음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화관을 쓴 여자애들은 크림색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들어왔고, 크림색 정장을 입은 남자애들은 짐짓 어른스럽게 걸으려 했다. 400여 명의 아이들이 1층을 가득 메웠고, 2층에 앉은 부모들은 제 아이를 눈으로 찾느라 바빴다. 

드디어 마지막 아이들이 입장하는 순간이다. 특별하고 귀한 아이들이었다. S시 전체에서 이번에 메디움에 가게 될 아이들은 남녀 각각 네 명씩, 파키오로 가게 될 아이들은 늘 그렇듯 남녀 한 명씩이다. 그렇게 성인이 될 아이들이 모두 들어오자 박수 소리는 더 커졌다. 


 다시 조명이 잠시 꺼졌다가 무대가 밝아졌다. S시 시장이 모습을 드러내 무대 중앙에 섰다. 시장을 본 사람들의 박수는 끊이지를 않았다. S시 최고의 인기남, S시를 일으키고 빛의 돔을 건설한 남자, 모두의 존경을 받는 파키오인, 제임스이다. 

무대 양쪽에 대형 홀로그램으로 강당 안의 모든 이목이 쏠렸다. 파키오인을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얼굴은 균형감을 갖추었고, 서글서글한 눈매에 미소 지을 때 양쪽 볼에 생기는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 


평소처럼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다도 시장의 모습이 궁금해져 주변을 살피다가 고개를 드는 순간 그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루다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아무렴, 잘못 본 것일 거다. 심장을 다독여 보지만,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닮았다.


이마부터 광대까지 매끄럽게 솟아올랐다가 다시 턱까지 부드럽게 내려가는 옆모습이, 이마와 비슷한 높이의 콧잔등이,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내려갔다가 콧방울 부분에서 살짝 올라간 코가 닮았다. 제임스도 안구가 살짝 앞으로 나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머리는 물방울 꼬리 모양으로 쳐졌고, 눈가는 물방울 머리 모양으로 둥근 것도 비슷했다. 

루다와 눈이 마주친 제임스는 싱긋 웃고는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은 파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날이지요. 성인식에 와 주신 모든 분께 파키오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기품 있는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끝나도록 적절한 눈인사를 곁들일 줄도 알았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제임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오늘 어른이 되는 모든 친구들, 축하합니다. 자리가 협소해 여기 강당에는 400명의 친구만 모였지만 이 시간 S시 곳곳에서 성인이 되는 우리 아이들 모두가 이 행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상에는 강당에 모인 아이들과 똑같은 옷을 입은 소년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밝은 빛에 반사된 아이들의 얼굴에 행복이 묻어 있었다. 조명이 다시 제임스를 비추었다.

“서기 2324년입니다. 파키오가 건설된 지 200주년, 파트리아가 건설된 지 150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추운 겨울은 지나게 마련입니다. 그 참혹한 시대를 지나 우리는 선대 어른들의 희생에 힘입어, 그분들이 바라는 미래가 되었습니다. 역대 가장 안정적인 시기에 들어섰다고 자부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이 땅을 비롯해 세상 어디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큰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종말을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린 자들의 결말은 폐허였습니다. 

폐허가 된 이 땅을 다시 살릴 수 있었던 건 타인을 배려하고 희생한 선대 어른들과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파키오와 메디움, 파트리아가 협력하면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어른들의 눈에 저마다 눈물이 맺혔다. 그들의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수없이 해준 얘기들이었다. 어떻게 이루어 낸 오늘인지 뒤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대학살의 시대는 겪지 않았어도 모두의 가슴속에 아리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진정한 평등을 이루었습니다. 모든 인종이 서로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종이 어울려 살고, 섞이고, 가족을 이루고 자손을 낳았습니다. 인종 차별이라는 악의 근원을 뿌리 뽑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는 하나의 국가, 트리아스를 이루었습니다. 그 어느 시대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입니다. 보이십니까, 여러분! 아름다운 파트리아, 우리의 영원한 초록별, 지구입니다.”


 홀로그램에 현재의 파트리아와 과거의 지구의 모습이 함께 떠다녔다.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황홀한 표정으로 떠다니는 두 행성을 바라봤다. 숲과 바다가 뒤덮인 옛 지구가 파트리아와 같은 별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둘은 태생부터 달라 보였다. 

‘숲이 어마어마하게 많은가 봐. 땅이 다 숲인가? 나무들이 얼마나 빽빽하게 들어서야 저렇게 보일까? 우리 파트리아는 저렇게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루다 역시 옛 지구의 모습에 홀딱 빠져들었다. 강력한 자석이 이끄는 것 같은 끌림이었다. 루다의 생각을 깨고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힘차고 더 분명한 어조였다.


“여러분이 어떤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지금의 파트리아는 볼품없죠. 오늘의 파트리아는 잿빛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오늘 오는 길에, 빛의 돔에 들어와 첫 정원을 보셨을 것입니다. 기적이지요. 지금은 아주 작고, 아주 연약한 한 포기의 풀이지만 언젠가는 초원이 되고 숲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우리는 이룰 것입니다!”

홀로그램에 뜬 두 개의 별은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다. 파트리아는 다시 생명이 별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졌다.


 “축사가 길어졌습니다. 우리 친구들 얼른 성인식 치르고 즐겨야 하는데 말이죠.”

사람들이 웃는 사이 홀로그램 파트리아 위로 두 개의 인공 행성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바로 알아보았다. 좀 더 큰 행성은 메디움, 그보다 작은 행성은 파키오이다. 둘 다 옛 지구를 닮았지만, 파키오가 훨씬 푸르렀다. 울창한 숲이 끝도 없이 뻗어 있을 것만 같았다.


“파키오와 메디움은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파트리아 위에 있습니다. 지난 200년을 거치며 우리는 이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파트리아가 옛 영광을 되찾을 때까지 말입니다. 메디움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산업, 물류, 금융의 중심지지요. 뛰어난 지능과 강인한 체력으로 계속 일할 수 있는 인공 인간 메디움인이 우리를 위해 일합니다. 


파멸한 인간들의 최대 단점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에는 왕도, 대통령도, 행정부도 계속 바뀌었습니다. 일관된 정책을 세울 수도, 실현할 수도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은 모두 죽게 되어 있으니까요.”

제임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자신이 다음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키오는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자기 업그레이드, 팀 평가 반영 시스템, 공동 의사 결정 시스템이 반영된 고성능 인공지능 몸을 이식한 신인류 위원회를 출범시켜 지난 300년간 파트리아와 메디움, 파키오를 안정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제!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해 세 인류가 서로의 행성을 오가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을 여러분께 선사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인식을 치르는 우리 아이들이 우리 세 행성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샌과 민우는 파키오에 정착하여 위원회의 가족이 될 것입니다. 파트리아에서 새로운 가족을 이룰 이들에게는 안락하고 편리한 집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은 메디움과 파키오가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처럼 건강하고 아름답게 생명을 유지하면 됩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샌은 살면서 겪은 설움을 모두 떨쳐낸 기분이었다. 루다가 아닌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 사람들은 최종 승자를 기억할 것이고, 기록에는 샌이 적힐 것이다. 의기양양한 미소가 입가에 번질 때였다.


“마지막으로, 파키오는 새로운 역사를 열 결단을 하였습니다. 메디움에서 연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메디움에 오는 청년들에게 파키오는 최대한 적절한 일을 찾아주고 있습니다. 물론 효율을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용한 결과 꽤 우수한 인재들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파키오는 올해부터 매해 메디움에서 일하는 청년 중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여 파키로오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파키오에서 행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파트리아에 세워질 첫 신도시에 투입될 인재 양성 프로그램입니다! 여기 8명의 친구 중에서 영광의 주인공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사람들은 제임스의 발표에 너나없이 기뻐했다. 메디움에 갈 아이들의 부모야 말할 것도 없었고, 신도시를 계획한다는 말만으로도 사람들을 들썩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딱 두 사람, 한 사람은 약이 올랐고 한 사람은 낙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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