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아이가 미술을 만나면' 中
두 딸의 엄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그림 속의 그는 가족과의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엄마다. 엄마의 시선으로 그린 그림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엄마, 강진이의 이야기다.
에디터 박은아 포토그래퍼 강봉형
평범해서 비범한
그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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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처음 두 발로 일어서던 순간, 볕 좋은 어느 날 아이와 걷던 길, 아픈 엄마를 걱정하며 이마를 짚던 고사리 같은 손의 감촉…. 아이를 키우다 보면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야속할 만큼 애틋하고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을 오랫동안 붙잡기 위해서 엄마, 아빠는 카메라를 들어 아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이 기록들이 지치고 힘든 순간을 견딜 힘이 됨을 알기에.
스쳐가는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데 있어 그림은 사진보다 한 수 위다. 그리는 사람의 감성이라는 필터링을 거친 그림은, 무심하게 흘려 보낸 일상의 조각에서 행복을 발견하게 하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강진이 작가의 그림이 특별한 건 그래서다. 딸의 앞머리를 잘라주는 모습, 한 돗자리 위에서 각자의 휴식을 즐기는 가족 나들이 날, 아이와 우산을 쓰고 유치원에 가는 길….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거나 키웠던, 나아가 어린 시절을 지나온 많은 이들에게 하나쯤은 있을 법한 추억을 소환해내는 그의 작품은 무척이나 일상적이고 소박하다.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림을 설명하는 담백하고 솔직한 일기 글이 파문의 깊이를 더한다.
강진이 작가가 대중에게 선보이는 작품은 대부분 아이를 키우면서 쓰고 그린 그림일기의 스케치를 캔버스로 옮긴 것이다. 이제는 열아홉 살, 열일곱 살이 된 두 딸이 크는 모습이 따뜻하고 생생하게 담긴 그림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014년 친구의 권유로 작품을 올리기 시작한 카카오채널 연재는 자고 일어나면 구독자 수가 몇 천 명씩 늘어나 있을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현재 그의 카카오채널 구독자는 5만 명이 넘는다.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지난해에는 그동안 작업한 회화 작품과 자수 작품, 일기 글을 묶은 책 <너에게 행복을 줄게>를 출간하기도 했다.
작품을 처음 대중에게 선보일 때는 자신의 그림이 너무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는 강진이 작가. 하지만 사람들이 보내준 따뜻한 호응을 통해 생각이 곧 바뀌었단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본인 아이 키울 때 생각이 난다고 하시고, 젊은 분들은 부모님 생각이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림을 SNS에 올리면 ‘나도 그래요’ ‘우리 아이도 그랬어요’ 하는 공감의 댓글이 무척 많이 달려요. 특히 아이 키우는 분들이 좋아해주세요. 그림을 매개로 육아 경험을 공유하면서 공감과 위로를 받는 거죠. 저 역시 그런 반응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되고요.”
여러 작품 중에서도 특히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꽃무늬 이불을 베란다에 널어놓고 차 한잔을 마시는 모습, 일상의 상념을 떨쳐내듯 화장실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뒷모습과 같이 주부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그림들이다. 누구도 자세하게 들여다봐주지 않는, 때로는 스스로조차 하찮게 흘려보냈던 자신의 일상을 따뜻하고 화사한 그림으로 마주하는 순간, 그 어떤 말보다 든든한 위로를 받는 것이다.
엄마가 된 화가,
화가가 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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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남다른 손재주 덕에 늘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들으며 살았던 그는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 속 세계보다는 집 안 풍경이나 가족의 모습을 그리는 게 좋았다.
“내 방 책상, 우리 집 장롱…. 그런 걸 그리는 게 좋았어요. 세밀한 그림을 좋아하기도 했고, 일상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가족들의 모습이나 일상의 이야기를 그릴 때 가장 즐겁고 스스로 충만해지는 걸 느껴요.”
좋아했고, 잘했던 일인지라 자연스럽게 화가를 꿈꿨고 미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떠난 배낭여행 중 뮌헨의 어느 서점에서 발견한 일러스트 작가 미셀 들라크루아(Michele Delacroix)의 그림에 매료된 이후에는 ‘한국의 미셀 들라크루아’가 되겠다는 구체적이고 포부 넘치는 꿈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꿈에 다다르는 길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결혼 후 두 딸을 키우는 일이 삶의 우선순위가 된 후에는 더욱 그랬다. 육아 중에도 꾸준히 외주 받은 그림을 그리고 동화책을 내기 위한 작업도 했지만, 온전히 작품 활동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엄마’이기 때문에 ‘화가’로서의 꿈을 펼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과의 시간이 행복했고, 엄마로 사는 게 좋았다. 그래도 화가로서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때 강진이 작가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림일기다. 퇴근한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밤 시간, 그는 일기와 간단한 스케치를 곁들인 그림일기를 썼다. 꿈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 불안할 때도, 아이와의 행복한 순간을 간직하고 싶을 때도, 내 맘 같지 않은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도, 별다를 것 없이 반복된 하루의 끝에서도 연필과 노트를 들었다.
언제 자랄까 싶던 두 딸이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점차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때부터 그간 그렸던 그림일기의 스케치들을 하나둘씩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으로 전시도 하고, 카카오채널에 연재를 시작하고 책도 펴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하나둘씩 현실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정체성을 녹여 낸 그림들이 그를 다시 화가로 살게 해준 셈이다.
나를 발견하는
미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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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이 작가는 이웃들 사이에서 ‘미술 선생님’으로 통한다. 그가 미술을 전공한 사실을 안 이웃들의 권유를 계기로 지난해까지 약 10여 년 동안 동네 아이들의 미술 수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하는 미술 시간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길 바랐다고 말한다.
“그림책 <백두산호랑이>를 쓰신 류재수 작가님이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이셨어요. 6년 동안 그 선생님께 미술 수업을 받으며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죠. 아이들에게 ‘네 마음대로 해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을 많이 하셨는데, 그게 아이들 각각의 개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거였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어요. 제가 선생님께 받았던 좋은 영향을 아이들에게 다시 물려주고 공유하고 싶었어요. 요즘 아이들을 보면 너무 바쁘잖아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죠. 저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걸 모른 채 어른이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사실 저희 신랑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려 노력하며 살아 온 사람인데, 자기 일이 적성에 안 맞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거예요(웃음).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미술에는 정답이 없어요. 그런 미술 시간만큼은 아이들이 편하고 즐겁게 즐기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기를 바랐어요.”
미술 수업을 할 때 일기 쓰기나 이야기책 만들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이유 역시 아이들이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랐기 때문. 강진이 작가의 이런 교육관은 두 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빈 시간’들을 주려 노력했고, 공부를 강요하는 대신 좋아하는 것을 찾으라고 강조했다.
“다행히 두 아이 모두 비교적 일찍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은 것 같아요. 물론 꿈이 바뀔 수도 있죠. 그래도 그 나이에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거, 그걸 위해서 스스로 노력한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행복을 나누는
할머니 화가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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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고, 이미 어른이 됐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발견하는 일이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자칭 ‘그림일기 전도사’인 강진이 작가는 부모들에게도 자기 자신과 일상의 소중함을 되찾는 방법으로 그림일기를 적극 추천한다.
“나이를 들고 돌아보니, 어릴 때부터 꾸준히 써 온 일기가 제가 원하는 것을 찾고 삶의 방향성을 그리는데 큰 힘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기를 통해서 그냥 흘러가버릴 수 있는 나 자신과 오늘 하루를 붙들 수 있던 거죠. 일기 쓰기가 익숙하지 않다면 처음에는 그 날 한 일을 짧은 메모로 남겨보세요.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작은 스케치를 같이 그려도 좋고요. 그렇게 일상을 기록하는 습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평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던 것도 새롭게 보게 되고, 일상의 매 순간이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아요.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고요. 매 순간 깨어 있게 되는 거예요.”
평범하게 반복되는 나날 속에 숨겨진 행복의 알갱이들을 찾아 엮는 강진이 작가.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화두를 묻자, ‘그리움’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그림일기 속 스케치를 캔버스로 옮기며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작가 본인의 어린 시절 기억을 자수로 놓으며 추억에 잠긴다. 오늘 일어난 어떤 순간을 포착해 기록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는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그리고 그리워하는 작업을 통해 역설적으로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좋다’ 정도로 느꼈던 순간이 나중에는 그리움이 되더라고요. 지금 이 순간도 지나고 나면 그리움이겠구나, 그러니까 오늘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강진이 작가는 스스로를 거창하게 ‘화가’ ‘예술가’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그는 꿈꾼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면서 그 속에서 평범한 행복들을 발굴해 나갈 줄 아는 ‘일상의 장인’으로 늙어갈 수 있기를…. 그 결과물들로 사람들과 행복을 공유할 수 있기를….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러려면 우선 제 삶을 잘 살아야겠죠. 제 삶이 결국 작품이 되는 거니까요. 미국에 일흔 살이 넘어서 그림을 시작한, ‘모지스 할머니’라 불리는 작가가 있어요. 성실하게 매일매일의 일상을 그려낸 작가죠. 저 역시 그분처럼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작품들을 그려나가면서 나이 들고 싶어요. 눈이 침침해지면 돋보기 도수를 높여가며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는 할머니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나이가 들수록 몸은 이곳저곳 더 아프겠죠. 아프면 아픈 대로의 나를 데리고 잘 살아가려고요. 병원 열심히 다니면서(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