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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Nov 17. 2020

마음에 심은 씨앗 한 알은,

<체리와 체리 씨> 베라 B. 윌리엄스 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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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이 예쁜 아이는 누구의 아이도 아니면서 모두의 아이일지 모르겠다. 눈은 선의와 기쁨과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잔잔하게 웃고 있는 이 아이는. 


아이의 이름은 비데미.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문화권의 고유한 이름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작가가 지어낸 상상의 이름일지도. 어쨌든 작품 속 화자(목소리로만 등장한다)가 첫 줄에 소개하길, 비데미는 화자의 집 ' 위층에 사는' 아이다. 


이 그림책은 비데미가 그리는 그림과 비데미가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다시 말해서, 비데미의 그림책에 대한 그림책이다. 소설 속 소설을 액자 소설이라고 하듯 이 책을 액자 그림책이라고 말해야 하나? 


비데미는 화자의 집에 잘 놀러 오는 것 같다. '그 애가 우리 집 현관문을 열면 나는 그 애에게 줄 새 마커를 들고 서서 기다리곤' 한다고 한 걸 보면 말이다. 비데미는 새 마커를 받으면 언제나 곧바로 그림을 그리는데, 항상 자기가 그리는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다. '이것은'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자, 비데미가 어떤 그림을 그릴까?


이것은 전철문이에요...


비데미는 전철문에 서 있는 아저씨를 그린다. 아저씨의 이마에는 (하도 걱정을 많이 해서 생기는) 굵은 주름이 하나 있고 머리에 피아노도 일 수 있을 만큼 힘이 세 보인다. 하지만 아저씨는 커다랗고 두툼한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 다만 작은 봉지 하나만 쥐고 있는데 그 봉지 속에는...


빨갛게 잘 익은 체리가 들어있다. 아저씨는 집으로 가서 아이들과 체리를 맛있게 나눠먹는다. 디디, 데니스, 두안, 도리와 함께 말이다. 아저씨는 아이들 입에 체리를 한 알씩 넣어 주고 또 넣어 주고 또 넣어준다. 


그렇게 아빠와 아이들은 체리를 먹고

씨는 뱉고

또 체리를 먹고

씨를 뱉고 하지요


비데미는 또 한 장 그림을 그린다. 이번에는 기차 안 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 


이것은 기차 안에 있는 의자예요. 


할머니 무릎에는 커다란 검정 핸드백이 놓여 있다. 핸드백 안에는 봉지가 들어 있는데, 이쯤 되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 뻔하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아마도 이 부분에서 야단법석 소리를 지르지 않을까? 체리야, 체리, 체리지 뭐! 하면서.


아저씨는 아이들과 체리를 나눠먹었고, 할머니는 할머니가 키우는 앵무새와 체리를 나눠먹는다. 할머니의 생김새, 기차에서 집까지 가는 길, 집안 모습, 앵무새의 생김새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기대되는 모습은 할머니와 앵무새가 체리를 사이좋게 나눠 먹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 대목이 어떨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운율적으로나 이미지로나.


우리의 예상이 꼭 들어맞는 이야기와 그림의 전개를 확인하는 일은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 못지않게 짜릿할 수 있다. (예상된 일이 예상된 대로 일어날 때 느끼는 재미는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서스펜스라고 한다는데,  그림책 이야기에 이런 용어를 갖다 쓰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서프라이즈보다는 소위 서스펜스의 재미가 더 큰 것 같고 개인적으로 나는 서스펜스를 무척 즐기는 축에 속한다는 얘기가 하고 싶어서 굳이 쓸데없는 말을 적었다.)


앵무새는 조심조심 씨를 뱉어내요.

할머니와 앵무새는 체리를 먹고 

씨는 뱉고, 

또 체리는 먹고 

씨는 뱉고 

하지요. 


비데미는 마지막에 자기를 그린다. 그림책 속의 비데미가 그리는 그림 속 비데미도 당연히 체리를 먹는다. 그리고 씨를 뱉고 또 체리를 먹고 씨를 뱉는데... 그다음부터 이야기는 조금 나아간다. 비데미가 그 씨들을 마당에 심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조금 더 나아가서 씨앗이 체리 나무로 자란다. 그리고 이야기는 또 나아간다. 이번에는 조금이 아니라 비약적으로. 


비데미가 심은 체리 씨는 큰 나무로 자라서 체리가 '나이로비와 브루클린과 토론토와 세인트폴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친구들과도 나눠 먹을 만큼',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뱉어서 지쳐 쓰러질' 정도로 많이 열리는 것이다. 비데미의 이 귀엽고 발랄한 상상은 체리를 먹고 먹으며 뱉은 씨앗들이 이제 '우리 동네'를 온통 체리 숲으로 뒤덮을 거라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체리를 한 입 깨물 때 그 달콤하고 신맛은 입맛의 침샘을 일제히 자극해서 침이 그야말로 콸콸 솟구치다시피 한다. 비데미의 체리 사랑은 이런 새콤달콤한 맛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매끈하고 빨갛고 동글동글한 체리의  생김새와 촉감도 큰 역할을 할 테다. 그리고 체리는 손에, 호주머니에, 작은 봉지에 쏙 들어갈 만큼 작아서 비데미가(혹은 어떤 아이들의 아빠가, 어떤 누이동생의 오빠가, 어떤 앵무새의 할머니가) 사랑하는 이(아이들과 누이동생과 앵무새)의 눈 앞에 깜짝 내밀어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 수도 있다.  


이 그림책은 입맛 없는 사람의 식욕을 일깨우고, 반수면에 빠져든 사람의 정신을 번쩍 깨우고, 풀어진 눈을 똘망똘망하게 잡아주는 체리 이야기다.


이 그림책은 우울하고 분노하고 지치고 살맛 잃은 사람을 웃겨서 마음을 순식간에 다정하고 밝게 만들어주는  아이의 이야기다. 


우울과 근심으로 천근만근 마음이 무거웠던 어느 날, 이 그림책을 읽고 하늘에 새가 날듯 기분이 가볍고 밝아졌다. 천근만근을 하늘로 날려 보낼 만큼 작가는 엄청 힘이 세다!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황량한 마당에 비데미가 정성껏 심은 씨앗에서 체리 나무가 자라나 동네가 무성한 체리 숲으로 변하는 건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하면서 그림을 그려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힘이 생겨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불가능한 일을 이뤄내는 기적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일을 실제로 일으켜서 '이것은' 기적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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