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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Jan 08. 2024

우리에게는 분개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나에게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내면에서 잠들지 못하는, 내 안에서 계속 뒤척이는, 잠 못 드는, 분개감이 있다. 어제도 나는 옷집의 한 직원에게 툴툴거렸는데,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젊은이에게,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하는 늙은 나의 모습은 틀림없이 추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뻔하고, 집에 돌아와서 창피했다. 혀를 찼다. 그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보이나, 그래도 이 분개감만큼은 털어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여기 이 부당함을 보세요! 소리치고 싶다.


요지는, 잔혹한 이스라엘의 얘기, 이스라엘에 속수누책으로 폭격당하는 팔레스타인들의 얘기, 인간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이중성에 대한 얘기가 하고 싶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었다. 아내와 딸을 잃었는데 다시 아들을 잃었다는 한 팔레스타인의 이야기가 헤드라인이었다. 며칠 전에도 기사를 읽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폭격을 개시했다는 소식. 또 읽은 다른 기사는 더 기막힌 것으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기사였는데, 선진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을 보며, 성공한 앨리트 노년의 '망가진 지성’을 떠올렸다. 거듭 혀를 찰 일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한 일이 한국의 보통 시민인 나한테 심리적 파동을 일으킬 일은 아닐 수도 있는데, 왠지 나는 신경이 쓰인다. 왜 그곳에서는 전쟁이 끊이질 않는가. 히틀러가 인간성의 끝장을 보여준 저 수용소의 이야기는 듣고 읽어서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인종청소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 지금은 인종청소의 주인공이 되어서 자신들의 정당함을 외치는 이 부당함, 이 정의 없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예전에,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쓴 유명한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다. 최근에 읽은 책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다. 이전의 저자들과는 달리, 프리모 레비는 '증언'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자신이 겪었던 인간의 악마성을 증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 사람들이 내면의 악마성을 깨우지 않도록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


동북아의 상황도 골치 아픈데 중동 상황까지 알아야 하나? 관심이 없었는데, 아마도 최근 몇 년 간의 내 개인사가 발단이 되었지 싶다. 하여간 중동의 역사를 속성으로 배웠고, 그렇게 해서 큰 줄거리는 알게 되었다. 선과 악은 흑백으로 명확하게 가르기 힘든 것이라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정언명제이다. 선과 악은 극단에서는 정확히 둘로 갈릴 수 있고, 정확히 인지할 수 있으며, 정확히 '이것은 선, 이것은 악'이라고 판단하고 단언할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저 먼 중동에서의 살해행위는 학살이 맞다! 어떤 조건도 어떤 이유도 어떤 변명도 허용해서는 안 될 범죄이다.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라는 2012년 제작된 다큐멘터리가 있다. 지금부터 10년도 더 된 영환데, 그 당시 상황에서 하나도 나아지지 않고 외려 훨씬 나빠진 이 상황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근본에서부터 흔든다. 태생이 부정적인 인간인 나 같은 사람만 아니라,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람들까지 비관에 빠져들게 하는 죄악이 그곳에서는 정당함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다.


원래는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싶었다. 이야기는 감동이다.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이스라엘 태생의 다니엘 바렌보임과 세계적인 석학인 팔레스타인 태생의 에드워드 사이드가 공동 발의해서 창단되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괴테의 <서동시집>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 시집에서 괴테는 동서양 문화의 이상적인 조화를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읽어보지 않았다.) 괴테는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독일어 번역)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 시집을 냈다.


오케스트라가 창단된 해는 1999년, 단원들은 아랍인과 유대인이 동일한 비율을 이룬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은 민족적 기원을 따지면 동일한 셈족이니,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 당시 기세를 더 뻗었더라면 이 두 민족은 똑같이 청소(!)를 당했을 것이라고,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단원들을 데리고 독일 바이에른 근교의 강제수용소를 방문한 뒤 단원들과 얘기를 나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장벽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대인들은 돈으로 팔레스타인의 땅을 사재기하고 있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순진하게 땅을 팔았다. 기꺼이.

왜 우리도 내 땅에 돈을 후하게 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팔고 싶지 않나.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로부터 교묘하게 땅을 몰수했다. 이스라엘은 사들인 땅에 유대인 정착지를 세우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장벽을 두른다. 이렇게 해서 팔레스타인 땅은 장벽으로 이리저리 분리되어, 가까운 두 도시가 우회로를 돌고 돌며 수많은 검문소를 통과해야 갈 수 있는 부조리한 상황이 벌쳐진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팔레스타인 안의 임시행정수도 라말라는 장벽으로 에워싸인 도시가 되었다.


장벽은 검문소가 있고, 검문소를 통과하려면 신분증과 서류가 있어야 하며, 검문소를 지키는 사람들은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이다. 팔레스타인 농부가 자기 밭을 살피러 나가려고 해도 일 년에 단 세 차례 밖에 갈 수 없다. 장벽 안에는 문화시설을 포함한 모든 편의시설들이 부재하거나 부실하고, 삶의 질은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키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보다 더 억울한 건, 장벽 밖의 사람들이, 아니 전 세계인들이, 자신들을 무지한 노동자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바렌보임도 팔레스타인을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라말라를 방문했을 때 자신을 감동시켰던 두 일화를 들려준다. 하나는, 라말라의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여인이 다가와 자신을 알아보며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는 일화.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지적인 사람들이라고 바렌보임은 이 일화를 얘기하며 말한다. 다른 하나는 가슴 아프다.


그는 라말라를 방문했을 때 피아노 공연을 열었는데,  공연을 보러 온 어린 소녀에게 공연이 좋았냐고 물었다. 소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온 것 중에 군인이나 탱크가 아닌 건 당신이 처음(You are the first thing~)이라고. 그래서 기쁘다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중동의 문제를 정확히 짚는다. 갈등은 좁은 땅에 너무 많은 민족들이 살면서 비롯된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화합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지당한 얘기지만, 세상일은 지당한 얘기가 지당하게 실현되지 않아서 비극이 되고 참사가 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음을 고백한다. 1999년 창단 당시에 가장 어린 단원이었던 카림은 요르단인으로, 열 살이었다. 그는 몇 년이 지난 뒤, 그때를 회고하며 말한다. 이스라엘인들은 인간으로도 안 보였어요... 어린 마음에 그 사람들하고는 벽을 쌓아야 되는 줄 알았어요... 이스라엘인들의 살인, 학살, 폭력만 봐왔거든요... (그들을) 겪어보니 저랑 똑같은 사람이더라고요. (이 오케스트라에 들어와) 사람을 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었어요.


한 이스라엘 단원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장벽을 세운 일에 대해 팔레스타인 단원들과 대화하며 묻는다. 네가 이스라엘에서 산다고 생각해 봐. 네 몸을 어떻게 지킬 거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원수로 여겨서 그들의 정착지로 들어가 자살테러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잠재적 살인자로 여길 수밖에.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 쪽에서는 유대인들은 침입자며 도적이며 원수가 아닌가.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와 형제와 친구와 동포를 죽이지 않았는가.

 

영화 제목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의 본질적인 문제를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Knowledge is beginning. 이 말은 곧 그들이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러니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앞서 열 살 소년 카림의 말대로,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시작이다.


오케스트라의 젊은이들은 순수해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며 미지의 문화와 삶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윗세대, 그리고 정치 문법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기득권자들과 권력자들은 애초에 이해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바렌보임이 이스라엘의 울프재단에서 음악부문 공로상을 수상하는 자리였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선언문을 인용한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기초한 건국이념은 자유와 정의, 복지의 실현입니다... 신앙, 인종,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사회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모든 접경국, 그리고 그 국민들과 평화와 우호를 유지할 것을 약속합니다. 바렌보임은 그 자리에서 묻는다.


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부합할까요? 우리 유대민족이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보냈다고 이웃국가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질까요?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쟁해결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십니까?
분쟁을 해결하는 데 군사적인 방법은 옳지 않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그의 수상 소감이 끝나자 참석자석에서는 환호와 야유가 동시에 터진다. 연단석에 있던 대통령과 교육문화체육부장관은 박수를 치지 않는다. 그리고 장관이 나오더니 반박한다. 울프재단의 의장으로서 저는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바렌보임 씨는 이 연단을 국가를 공격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또다시 참석자석에서는 찬반의 환호와 야유가 터져 나온다. 그때 장관이 소란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말이 문화인답게 행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화인이라... 문화인이 이렇게 쓰일 수도 있구나, 탄식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울프재단의 한 자문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날 죽이려고 덤비는 사람과는 화해가 아니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이슬람 세계는 유대인 독립국가인 이스라엘을 파괴하려고 혈안이라고. 수상식에서 벌어진 이 모습은 이스라엘 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싶었다. 팔레스타인과의 화합을 추구하는 바렌보임에게 상을 수여함으로써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사람이 아닌 적으로만 인식하는 국수주의적 시각을 가진 이들로 이스라엘도 갈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스라엘의 국가적 방침은 절대 바렌보임의 편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아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지속되던 2005년 8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극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임시행정수도 라말라에서 첫 공연을 연다. 그곳은 위험지역이었고, 이스라엘 단원들은 호위를 받으며 극비리에 공연 직전에 그곳에 도착한다. 라말라는 아래 지도에서 웨스트뱅크 안에 위치한 도시다.


 



팔레스타인에게 이스라엘의 정부 수립은 악몽의 시작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말한다. 전 예루살렘 태생의 팔레스타인 사람인데 제 나라의 역사와 선조들의 터전은 1948년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되면서 산산조각 났죠. 그때 이후 제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런 사이드가 정치보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사람됨을 보여준다. 그게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우리가 가야 할 바른(!) 길 말이다.


앞서 울프재단의 자문위원은 전쟁을 하겠다는데, 사이드는 화해의 손을 내민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왼뺨을 내어주고 기꺼이 오른뺨을 내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그러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어제 옷집의 그 여직원은 툴툴거리는 나를 보며 순하게 웃었는데,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모르나, 그 웃음으로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했던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사들이며 장벽을 세우는 행위로 국제적 제제를 받았지만, 결국 장벽은 팔레스타인 내의 도로를 끊으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장벽과 장벽들 사이에서 고립시키고 말았다.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장벽 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장벽 밖 사람들이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담당하는 십 대 소녀 타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가 라말라를 방문해서 공연을 열게 된 것을 기뻐한다.


사람들한테 라말라를 보여주게 돼서 기뻤어요.다들 팔레스타인 사람들 생활상을 모르거든요. 이스라엘인들은 물론이고 다른 아랍국가 사람들도 잘 몰라요.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 줘서 뜻깊었어요.
정치적인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다만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빌어요.
이 서동시집 워크숍은 음악 이상의 뭔가를 가르쳐줘요.
지금은 뭐랄까... 제 소원은요,
기적 같은 게 일어나서 지금 이 상황이 완전히 끝나는 거예요.


그녀의 소원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너무 멀고 너무 불가능해서 사람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기적은 있는데, 소녀는 그러한 기적을 소원한다.


라말라에서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웃고 사랑하며 삶을 즐긴다. 시장에서는 물건을 사고팔며 일상은 이어지고 있다. 그곳에 음악학교가 있다는 것도 기적이다. 선량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적 말이다. 소녀의 저 말은 삶을 사랑하고 있는 우리를 보세요로 내 귀에 들린다. 당신처럼 우리도 삶을 사랑한답니다라고.


우리는 너무 모른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대로 '아는 것이 시작'일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내내 '대화'를 강조한다. 단원들도 내내 '대화'를 강조한다. 가족과 친구가 자살폭탄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니 아랍 단원들은 이스라엘단원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할 테고, 이스라엘 단원들도 아랍 단원들과 섞여있는 게 거북할 거예요... 그래서 대화가 중요해요.


중동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극단의 비극을 겪었던 유대인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가장 어둡고 잔인한 얼굴을 드러내준다. 왼손이 그린 것을 오른손으로 지우는 모순은 인간의 본능 깊은 곳에서 자라 나오는 게 아닐까, 두렵다. 짙은 어둠은 불가해한 것이어서 그곳에 악만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거기에는 선량함도 있을 것이다. 그 선량함이 소녀가 말하는 '기적'을 만든다. 기적은 신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신은 지금도 우리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는지 모른다. 선량함에 대해서. 총을 내려놓으라고. 미움을 거두라고. 불평하는 그 입을 닫으라고. 미소 지으라고. 다만 그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이스라엘 사람 다니엘과 팔레스타인 사람인 제가 친구가 된 이유가 있어요.
다니엘은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할 줄 알고 희생도 불사한다는 것이 장점이죠.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은 자신을 약자라고 여기며 남한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기 바쁩니다.
우리도 할 일은 있어요. 고통을 치유하는 데 일조할 수 있어요.
일단 현재 상황을 똑바로 들여다보세요.
시민으로서, 음악가로서 자신이 할 일이 뭘까 고민하세요.
- 에드워드 사이드

 



*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극비리에 진행된 라말라 공연을 주제로 제작되었다. 영화의 원제는 <Knowledge is the Beginning> (파울 슈마츠니 감독). 영화는 오케스트라의 공동 발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사이드의 인터뷰와 오케스트라의 연습 장면, 단원들의 개인 인터뷰와 대화, 바렌보임의 라말라 방문과 개인 공연, 라말라 공연의 긴박했던 모습들을 수년에 걸쳐 담았다.


* 다음 유튜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속성으로 배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고 유익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vnWeoa_dQk&t=166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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