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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Apr 26. 2024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이문재의 시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 없이 햇빛의 문을 잠가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도 말하고

눈빛이 초록빛이라고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햇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시가 굵은 장대비를 뿌린다. 우리의 구두를 적신다.

'외투'와 '초록빛'과 '햇빛'과 '젖은 구두'는 무얼 상징하는 걸까 생각하며 시를 분석해 봤다.

그늘을 먹고 그늘과 함께 잠드는 '그'의 존재도 생각해 봤다. '그'는 시인을 이 세상에 낳은 이. 그렇다면 그 존재는 아버지일까, 신일까, 혹은 운명일까.


시의 통일성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시인이 씨름하고 있는 것은 무겁고 어둡고 절망스러운 생명을 시인에게 부여한 '그'라는 존재인데, 사람들의 시선과 좋아해 줌이 '그'와의 대결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인은 왜 굳이 시의 통일성을 방해하면서까지 이 구절을 넣었을까.


하지만 이런 것들을 길게 적었다가 그만두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문득, 길고 긴 현학적인 시 분석은 텅 빈 껍질이란 걸 깨달았다. 시의 낱말들이 무얼 상징하든 아니든, 시는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은가. 시인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


아는 사람이 오래전 봉쇄수녀원에 들어가 10년을 그곳에서 지냈지만 종신서원을 받지 못하고 나왔다. 하지만 그때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온전히 자급자족을 하며, 온 세상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지냈던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세상으로 나와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진짜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또 긴 시간이 흘렀고, 이제 조금은 '기도함'의 의미를 알 것만 같다. 이 세상 하늘 아래 어느 곳에서 누군가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외로운 사람을 위해. 외로운 사람은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가 있다. 그이를 위해 기도해 주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순수히 사랑만을 담아 기도를 보내는, 누군가가 있다.  


시의 화자가 짊어진 무겁고 짙고 거대한 고통은 나약하고 비현실적인 기도로 해결되지 못할 게 거의 확실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누군가가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가 무조건적 사랑을 그이에게, 우리에게, 보낸다.


시집의 초판은 1988년이고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나서 다시 출간된 같은 이름의 2001년판 시집에서 시인은 아직도 구두는 젖어 있고, 이제는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주지 않고 제국에게 보여주기도 할 것이라고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여기서 제국이란 현대문명국가를 말하는 것 같다.) 그때까지 시인의 구두는 젖어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젖은 구두는 영영 마르지 못할지 모른다.


이 세상 하늘 아래 어느 곳에 어떤 순결한 사람이 있어서, 그이는 우리의 젖은 발을 오래 쓰다듬으리라. 우리를 위해 사랑의 기도를 하리라. 이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할지언정, 마음으로 사랑을 보내리라. 효용성의 시대에 아무런 쓸모없는 기도일지언정.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Nk4nm7DUdMY


넌 마치 약속 같은 사람이야

여름날 아침 같기도 해

넌 미소 같아

맞아, 넌 그런 사람이야


나의 온 희망, 그게 너야

넌 시원한 빗물이고

힘찬 바람이야

맞아, 넌 그래


넌 나의 샘물이고

나의 집을 따뜻이 덥히는 불이야


내 사랑, 넌 그런 사람이야

나의 시

늦은 저녁의 기타 소리

나의 지평선

넌 넌 바로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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