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프링버드 Dec 07. 2020

함께 살고, 살았으며, 살아갈 우리

<선인장 호텔> 브렌다 기버슨 글 / 미간 로이드 그림





뜨겁고 메마른 사막, 한낮의 시간, 한 사구아로 선인장에서 빨간 열매가 떨어져 까만 씨들이 쏟아져 나온다.

서늘한 저녁이 되자 늙은 사막쥐 한 마리가 선인장 열매를 먹고 수염에 씨앗 하나붙인 채 모래 위로 종종종 사라진다. 그 씨앗은 우연히 팔로버드 나무 밑에 떨어졌고, 거대한 선인장으로 자라나 이백 년 동안 사막의 다른 생명체들과 어우러져 살아간다. <선인장 호텔>은 사막에서 싹을 틔운 선인장 하나가 성장하고 늙어 흙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이 선인장은 아주 천천히 자랐다. 십 년이 되어도 겨우 어른 손 한 뼘 크기밖에 되지 못했고 이십오 년이 지나야 다섯 살 아이 키에 도달했다. 하지만 사구아로 선인장의 삶은 애초에 인간의 시간을 따르지 않아서 우리 눈에만 느리게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선인장은 오십 살이 되자 성인 여자 키의 두 배에 이르렀고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사람의 정수리쯤 해당되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하얗고 노란 꽃들은 해마다 사막의 새와 벌과 박쥐들을 불러들였다. 딱따구리가 선인장에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를 만들면서 선인장은 이제 호텔(!)이 됐다.  


백오십 년이 지났을 때 선인장은 성장을 멈췄다. 선인장의 키는 성인 남자 키의 세 배, 무게는 팔천 킬로그램에 도달했으며, 가지도 여러 개나 뻗었다. 새들은 엄청나게 큰 이 호텔에 크고 작은 구멍들을 무수히 팠고 주변 모래 속에도 개미, 쥐, 도마뱀, 뱀, 토끼, 여우들이 사는 크고 작은 구멍들로 가득했다. 거대한 선인장 하나가 생명체들에게 삶의 자리가 되어준 것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새들이 알을 낳고, 사막쥐가 새끼를 길러내고, 곤충과 박쥐가 이사를 오고 간다.


그리고 이백 년이 지난 어느 날, 늙은 선인장 호텔은 바람에 쓰러졌다. 가지들은 부서졌고 동물들은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쓰러진 뒤에도 마지막으로 선인장 호텔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다. 바로 지네와 전갈과 개미와 흰개미와 땅 뱀이다.


이 거대한 사구아로 선인장 주변에서는 어느새 어린 선인장들이 싹을 틔워 숲을 이뤘다. 그리고 이 가운데 몇은 뜨겁고 춥고 비 오고 메마른 날들을 다 견뎌 내어 크게 자라나 또 다른 선인장 호텔이 될 것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 이 그림책을 다분히 교육적인 의도로 골랐더랬다. '선인장의 일생을 통하여 어린이에게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갖게 해 주는 그림책'이라는 책 뒤표지의 소개말은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소개말은 이 작품이 주는 감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선인장의 삶을 통해 인생을 보았답니다.'라는 한 독자의 짧은 감상이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표현한 것 같다.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선인장의 일생에 나의 일생을 대입하게 된다.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씨앗이 '우연히' 늙은 쥐의 수염에 붙었다가 '다행히' 큰 나무 아래 떨어졌다는 우연성부터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 아, 그렇지, 나도 우연히 태어나 다행히 지금까지 살아왔, 하며 마치 새로운 사실을 깨치기라도 한 듯이 시야가 새삼스레 넓게 트이는 느낌이다. 씨앗을 수염에 붙여서 탄생의 기회를 제공한 동물이 늙은(!) 쥐라는 것부터 왠지 마음이 짠하다. 생명의 고리는 이미 이 순간 이어지고 완성되는 셈이다.


선인장이 자라고 늙어 (별것도 아닌) 바람에 쓰러지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지만, 살아있는 동안 수많은 생명체들을 품어주는 모습은 삶의 가치가 생명의 아름다운 순환과 조화에 있음을 말해준다. 개인으로 보자면 인생은 생로병사의 고통이요 허무일지 모르겠지만, 생명체 전체를 생각하면 이 세상은 마치 조화로운 관현악처럼 연주되고 있으며 우리는 각자 그 안에서 음표가 되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훨씬 너그럽고 밝아지는 것 같다.  

 

그림 작가 미간 로이드는 선인장의 일생을 최상의 구성과 색으로 표현해내서,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선인장 꽃 향기가 풍기고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는 것만 같다.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면 맨발로 뜨거운 사막 모래 위를 딛고 서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글 작가 브렌다 기버슨도 존경스럽다. 메마르고 피상적인 사실 정보에서 생명의 경외감을 읽어내는 혜안이 우선 놀랍고, 그것을 이렇게나 따뜻하게 이야기해낸 능력 또한 놀랍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시에 두 세계에 산다는 것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