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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Dec 14. 2020

반쪽 인간

<반쪽이> 이억배 그림 / 이미애 글




민담을 소재로 만든 그림책으로 1997년에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이야기도 재밌지만 이 그림책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것은 그림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이억배 작가의 화풍은 가벼운 듯 진중하고 전통색을 잘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장면 구성과 재치 있는 묘사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다. 이 그림책을 읽고 자란 아이들은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 다시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줄 것 같다. 세대에서 대로 물려주고 물려받는 그림책이라, 이거야말로 그림책 작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그림책이 아닐까?




옛날 깊은 산골에 어떤 아주머니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서 신령님께 지극정성으로 빌었더니 '뒤뜰 우물에 잉어 세 마리를 내려줄 테니 구워 먹으라'라고 신령님이 알려주신다. 아주머니기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우물가로 갔더니 정말 우물에 큰 잉어 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주머니는 신령님의 말대로 잉어를 구워서 먹는데, 두 마리 반을 먹고 배가 불러서 잠깐 쉬는 사이 고양이가 남은 반쪽을 날름 물어가 먹어버린다. 얼마 뒤 아주머니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마지막 잉어를 반쪽만 먹은 탓에 셋째 아들이 그만 반쪽이가 되었다. 입도 코도 눈도 귀도 팔도 다리도 모두 하나씩밖에 없는 반쪽이가.


아들들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첫째와 둘째 아들이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다. 반쪽이도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형들은 동생이 창피해서 큰 바위에 묶고 큰 나무에 묶어서 따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반쪽이는 힘이 장사여서 바위도 번쩍 나무도 쑥, 어머니 집에 쿵 내려놓고 형들 뒤를 따라갔다. 형들은 약이 올라 반쪽이를 밧줄로 꽁꽁 묶어 호랑이가 나오는 깊은 산속에 던져버렸다. 반쪽이는 밧줄을 툭툭 끊어내고 호랑이를 다섯 마리나 잡았다.


반쪽이가 호랑이 가죽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부잣집 영감을 만났다. 영감은 호랑이 가죽이 탐나 호랑이 가죽과 자기 딸을 내기로 걸고 장기 세 판을 두자고 했다. 반쪽이가 장기에서 이기자 영감은 딸을 못 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반쪽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럼 내가 오늘 밤 (영감님 딸을) 업어 갈 테요."


영감네 집에서는 딸을 지키려고 야단이 났는데,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밤이 지나도 반쪽이는 오지 않았다. 세 번째 밤이 되자 모두들 지쳐서 쿨쿨 잠이 들었고 반쪽이는 잠든 사람들에게 몰래 가서 떡시루를 씌우고 상투를 서로 묶고 북이랑 꽹과리를 손에 잡아매고 영감 수염에 유황을 발랐다. 그리고 딸이 자는 방에 벼룩을 술술 뿌려서 딸이 "아이 따가워." 하고 방에서 뛰어나오자 냉큼 업고 달아나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반쪽이가 영감 딸 업어 간다."


고함소리에 모두들 잠을 화다닥 깼는데, 유황을 바른 영감 수염에는 불이 붙고 상투는 묶였고 떡시루 속은 깜깜하고 손에서는 북 꽹과리가 둥둥 꽹꽹 정신없이 울렸다는 얘기. 그래서...

반쪽이는 영감 딸을 색시로 삼아 호호백발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살았다.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주인공이 반쪽이니까. 게다가 제일 어린 막내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이 세상 걱정없이 살 거라고 여기며 부러워하지만,막상 아이들 자신은 어리다는 사실을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지 않다.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고, 세상사를 알아가는 만큼이나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도 같이 깨닫게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무력감과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힘이 되어주는 게 바로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입도 눈도 팔도 다리도 하나씩밖에 없는 반쪽이는 형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못된 영감을 혼내주며 예쁜 색시까지 얻는다. 그리고 호호백발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살았다니 이 얼마나 통쾌하고 안심되는 이야기인가!


그러고 보니 이억배 작가의 그림에 가려서 첫눈에는 드러나지 않던 글 작가의 솜씨가 이제야 보인다.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 노래하듯 운율이 맞고, '... 했대' 식의 2인칭 화법도 적절하며, '지글지글, 날름, 쿵, 술술, 화다닥' 같은 표현들이 이야기를 아주 경쾌하고 감각적으로 만들어준다.  


내용도 해학적이다. 반쪽이가 바위를 번쩍 들어서 집 마당에 내려놓으며 아주머니와 주고받는 말이 아주 재밌다: 얘야, 이게 웬 바위냐? - 어머니 힘드실 때 걸터앉아 쉬시라고요. 이 대화는 큰 나무를 뽑아서 마당에 내려놓으며 다시 한번 반복된다. 아이들은 이런 대목에서 신나게 웃는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어른도 같이 웃을 수밖에. 그리고 소재가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다듬고 매 장으로 나눌 것인가 하는 구성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고전은 고전인 이유가 다 있다.




한편으로 이 민담을 전혀 다른 식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령 이런 질문들을 해보는 거다:


- 왜 아주머니는(혹은 반쪽이는) 남편이(혹은 아버지가) 없을까?

- 왜 하필 잉어일까? 호박도 있고 인삼도 있고 닭도 있는데.

- 반쪽이는 바위와 나무를 왜 어머니에게 갖다 주는 걸까? 길에다 버려두고 얼른 형들을 따라갈 수도 있을 텐데.

- 이야기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3의 의미는 뭘까? 잉어 세 마리, 아들 삼 형제, 셋째 아들, 바위와 나무와 호랑이로 이어지는 형들과의 힘대결에서 우리는 계속 3이라는 수를 만나게 된다.

- 무엇보다도, 왜 반쪽이일까?


민담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학문적으로 타당한 추정을 하기 어렵지만, 아버지 없이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과 반쪽이의 모험은 분명히 연관이 있어 보이고, 이야기가 '늙은 어머니'에서 시작되어 '어리고 예쁜 색시'로 마무리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반쪽이가 이야기 끝까지 가도 여전히 반쪽이로 남는다는 사실은 무슨 의미일까? 사람은 부족해도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결핍이 새로운 길을 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육신이 온전한 두 형들은 과거를 보러 가는데 그것은 사회적 관습대로 산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쪽이는 과거 보는 형들을 따라가다가 전혀 새로운 삶의 반전을 맞이해서 훨씬 귀한 보물인 색시를 얻게 된다. 색시는 물리적으로 진짜 색시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정신적 풍요로움으로 읽어도 좋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보기에, 반쪽이의 모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 때문에 더 복잡하고 촘촘한 완결성을 갖춘 형태로 발전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반쪽이>가 이야기로서 갖고 있는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의 초입부에 막 들어선 어린아이들에게는 자신 있게 길을 걸어가게 해 줄 모범이 필요하고, 지평선에서 아스라이 사라지는 길을 보며 선뜻 발을 내디딜 용기가 나지 않을 때 '호호백발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며 불안을 가라앉혀줄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꼭 사람이 아니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의 힘은 대단하다.  

 



* <반쪽이>를 읽으면서 같이 읽은 책이 <그림동화 남자 심리 읽기>입니다. 오이겐 드레버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 겸 심리학자의 책인데 그림동화 편을 분석한 책입니다. 읽기 까다로운 부분도 있지만 민담의 표면적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를 밝히는 흥미로운 책이어서 <반쪽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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