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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Dec 26. 2020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케이트 뱅크스 글 / 게오르그 할렌슬레벤  그림



의자 밑에 신발 두 짝이 나란히 놓여 있어요.

창문은 활짝 열려 있고요.

달빛은 창문으로 흘러 들어와 포근하게 방 안을 비춰줍니다.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숲 속의 고요한 밤과

저녁밥을 먹으러 집으로 바삐 돌아가는 도마뱀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엄마가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시계는 똑딱똑딱 소리를 내고요.

불빛은 복도를 환하게 비추네요.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님과

나무 옆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아빠가 그림책을 펼칩니다.

책장을 넘기자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듯이 이야기가 주르르 펼쳐져요.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사막을 휩쓸고 지나가는 모래 바람과

낙타와 함께 언덕 아래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침대 옆 탁자 위에는 유리컵과 장님감 배, 그리고 불가사리가 있어요.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바닷가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고운 모래,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선반 위에 있는 오르골에서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창가에 매달린 모빌은 살랑살랑 음악에 맞춰 춤을 추네요.

토끼는 소파에 앉아서 아름다운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나무 위를 지나가는 바람과

둥지에서 편히 쉬고 있는 작은 새 가족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엄마가 아이 옆에 토끼 인형을 놓아두었어요.

토닥토닥 이불을 잘 덮어 준 다음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먼 나라에 살고 있는 동물과

새끼들을 핥아주는 엄마 사자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아이의 눈이 스르르 감겨요.

새근새근 숨소리만 들릴 뿐 주위는 고요합니다.

깜깜한 밤, 인형 친구들도 꿈을 꿉니다.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포근한 침대에서 토끼 인형과 함께 코 자고 있는 아이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그리고 달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일 거예요.

"잘 자, 좋은 꿈 꾸렴!"




아쉽게도 절판된 그림책. 그래서 전문을 적었다. 모두 읽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 작가와 그림 작가의 호흡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잠자리에서 읽어주기 좋은 평화로운 내용에 색감이 풍부하고 안정적이어서 이 그림책을 보며 잠이 들면 그대로 이 세계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였다. 남편이 이 그림책을 읽어주고 나는 설거지를 했거나 다른 집안일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남편의 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운 시를 읊조리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일손을 놓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글의 운율이 너무나 아름답고 규칙적이어서 마치 물결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영어 원문을 이토록 매끄럽게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의 공로를 절대 무시하면 안 될 것 같다. 김양미 번역자다!)


달님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 온 세상을 구석구석을 내려다보며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해줄 수 있겠지, 하는 상상은 세상을 따뜻한 우리 집으로, 또 우리 집을 큰 세상으로 안아주고 열어주는 듯하다.


엉뚱할지 모르겠는데, 이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존 레넌의 <Imagine>이 떠오른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상상하기 어렵지 않아요.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우리 위에 하늘만 있는.

모두가 오늘을 사는 걸 상상해보세요...


인류가 현학적인 이념과 관념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아이들이 삶의 쓴맛을 보기 이전에, 우리가 부조리한 세상을 이해해보려고 지적으로 탐구하기 이전에, 내가 옳다는 걸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기 이전에, 다시 말해서 인류 차원에서나 개인 차원에서나 고도의 지적 발전을 이루기 이전에, 사람은 성장기에 애니미즘의 세계 속에서 세상과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한 시기를 거치는 것 같다. 대략 대여섯 살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 아이들은 더없이 낙천적이고 의욕적이었으며 동물이며 곤충이며 온갖 세상 만물과 한 형제였던 기억이다. 존 레넌의 상상은 세상과 완벽하게 합일했던 그 시기를 무척이나 닮았다.


우리는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고 세상의 시간을 태초로 돌릴 수도 없다. 인류는 너무나 똑똑해져서 애니미즘 따위는 이제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의 아이들은 여전히 애니미즘의 한 시기를 산다. 그래서 어른들도 잠시 아이들의 그 세계로 슬쩍 들어가 볼 기회가 생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시 안식한다. 존 레넌의 노래가 어쩐지 우리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그가 노래하는 상상의 세계가 실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희미하게 살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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