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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Jan 04. 2021

<그림책의 힘>

가와이 하야오, 마츠이 다다시, 야나기다 구니오 / 마고북스


코로나로 도서관이 휴관을 했다. 대출도 할 수 없는데, 당분간은 계속 이 상태로 갈 것 같다. 그렇다면 집에 갖고 있는 그림책 이론서를 소개하면 어떨까 싶어서 제일 먼저 <그림책의 힘>을 골라봤다. 일본의 그림책 편집자, 정신분석학자, 논픽션 작가를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독특한 책이다.




이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해는 2001년이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2003년이니 거의 20년 전에 만들어진 책인데 별로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림책에 대한 애정은 유행을 타지 않기 때문일까?


한국의 그림책 수준은 그 사이 눈부시게 발전해서 훌륭한 책도 많이 나오고 있고 개성 있는 그림책 작가들도 정말 많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책을 유아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부터도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그림책에 관심을 갖게 됐으니.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현재 중장년층들은 그림책이 없는 유년기를 보냈으니까. 옛날에는 책이 정말 귀했는데...


<그림책의 힘>은 2000년 11월에 '그림책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심포지엄의 강연과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마츠이 다다시(그림책 편집자), 가와이 하야오(정신분석학자), 야나기다 구니오(논픽션 작가)는 그림책을 각자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데, 마츠이 다다시에게 그림책은 종합예술로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갖춘 책이며 가와이 하야오에게는 더없이 넓고 깊고 오묘한 세계이고 야나기다 구니오에게 있어서 그림책이란 인생 후반기에 찬찬히 읽어야 하는 책이다.


그림책 편집자로서 일본 그림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마츠이 다다시는 그림책 창작과 출판 등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로 중요한 점들을 언급하는데, 핵심은 그림책이란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 귀로 문장을 들을 때 온전히 그 가치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드넓은 그림책의 세계는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 귀로 문장을 들을 때의 신비로운 작용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어린이들은 그림을 읽습니다. 어른은 그림을 보지만 어린이는 그림 속에 있는 말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청각을 통한 말의 세계를 체험합니다. 귀로 들은 말의 세계와 눈으로 본 말의 세계가 어린이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때 그림책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츠이 다다시는 어린아이들에게 글자를 일찍 가르치지 않기를 권유한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에게 글자를 일찌감치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게 지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아이에게서 중요한 세계를 뺏은 꼴이 됐던 것인가 싶어서 잠깐 안타까웠다. 혹시 글자를 아주 늦게 가르쳤더라면 지금쯤 아이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으려나?)


마츠이 다다시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에 귀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림을 봤던 경험들, 그림을 읽으면서 느꼈던 재미, 말과 그림의 작용 속에서 느낀 유쾌한 긴장감 등이 그림책 편집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마츠이 다다시의 얘기 중에서 개인적으로 두 가지가 매우 흥미로웠다. 하나는,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과 눈으로 읽는 것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글이 그려내는 심상이 훨씬 풍부해지고 말의 울림이나 리듬, 어감 등이 주는 조화와 아름다움을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어릴 때 책을 소리 내어 읽곤 했는데 그때의 느낌은 각별했다. 내 목소리가, 내 몸이 악기처럼 언어를 연주했달까. 낭독을 할 때 우리는 음악을 듣는 것 못지않게 아름답고 기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두루마리 그림에 대한 정보였다. 일본 두루마리 그림의 전통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것이 '쵸쥬기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같은 두루마리 그림이 있지만 '쵸쥬기가'는 동물을 의인화해 그린 풍자만화라는 점에서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쵸기가'에는 인물과 사건이 얽히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다.


'쵸쥬기가' 의 한 장면



융 정신분석학자인 가와이 하야오는 그림책이 우리에게 소리를 환기시킬 수 있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한다. 그림책을 열면, 꼬마가 밭을 갈아서 쑥쑥쑥 식물들이 자라고, 한밤중 살며시, 스르륵 같은 아무개들이 유치원을 찾아오며, 어쩌면 영혼의 소리인 듯 소년이 플루트를 불고 있다. 그림책이 들려주는 이런 소리들을 우리는 마음의 귀로 듣는다.


논픽션 작가인 야나기다 구니오는 57세 때 25세 아들을 잃으면서 그림책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몇 달을 보내다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 갔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림책 코너를 서성이더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읽어줬던 그림책을 펼치게 됐고, 그때부터 이런저런 그림책들을 읽으며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형제의 죽음을 앞둔 어린아이에게 그림책을 통해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끔 도와준 어떤 의사의 일화를 들려주는데, 참 인상적이다.  


위의 세 사람은 매우 다른 위치에서 그림책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점은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르다.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한데, 그림책은 예술의 한 형태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림책은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연령대가 즐길 수 있다. 좋은 예술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감동시킬 수 있으니까.


사람마다 취향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역사서를, 어떤 사람은 시를, 또 어떤 사람은 소설을 좋아하듯이, 어떤 사람은 그림책에 매료다. 그리고 어떤 분야든 시작이 있어서 그림책도 출발은 어린이용이었을지 모르나 그림책의 미래는 '열려' 있다. 싱그럽고 아름다운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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