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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Nov 30. 2020

동시에 두 세계에 산다는 것은,

<Mousewife> 루머 고든 글 / 펜 뒤 부아 그림

이 이야기는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여동생 도로시 워즈워스의 일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는 한데, 이렇게 얘기해서 아쉽지만, 도로시의 쥐는 비둘기를 새장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 쥐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래서 새를 풀어줬다. - 루머 고든



이 그림책은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제목은 <쥐 부인>. 글을 쓴 루머 고든은 영국 작가로 어린이책도 쓰고 소설, 희곡, 시도 썼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녀의 작품은 단 세 편밖에 없다. 모두  어린이책이다. 그중에서 <인형의 집>을 읽어보았는데, 가볍게 읽으려고 치면 가벼운데 실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녀가 쓴 이 그림책 <쥐 부인>만큼이나.


자그마한 크기에 45쪽으로 이뤄진 이 아름다운 그림책이 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을까 안타까운데 한편으로는 삽화가 아이들의 관심을 끌만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목탄과 검은 잉크로 그렸음직한 짙은 회색의 부드러운 터치가 이야기의 결과 정말 잘 어울린다.


 




옛날 옛적 다른 쥐들과는 다른 한 작은 쥐 부인이 있었다.


이 쥐 부인은 다른 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귀도 코도 수염도 눈망울도 평범한 생쥐 그대로였다. 자그마한 몸, 회색 털도, 가느다란 발이며 긴 꼬리도. 쥐 부인은 남편이 있었고 다른 쥐들처럼 부지런히 음식 부스러기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쥐 부인에게는 어딘가 생쥐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남편은 쥐 부인에게 충고를 했다.


"당신은 뭘 더 바라는데? 난 치즈를 생각해. 당신도 치즈를 생각해봐."


쥐 부인 자신도 자기가 무엇을 바라는지 몰랐다. 하지만  치즈는 아니었다. 그녀는 '가끔씩 창틀로 기어올라가 유리창에 수염을 바짝 갖다 대고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집쥐였기 때문에 바깥세상을 전혀 몰랐다.


어느 날 쥐 부인 가족이 살고 있는 노처녀 바버라 윌킨슨의 집에 한 사내아이가 비둘기를 잡았다며 가져왔다. 미스 바버라 윌킨슨은 비둘기를 금박 창살이 쳐진 멋진 새장 안에 가뒀다. 그리고 설탕 덩어리와 고기 비계, 완두콩 같은 맛있는 모이를 줬다. 비둘기는 창살을 부리로 쪼고 날개를 몇 번 퍼덕거릴 뿐, 루쿠루쿠... 하고 우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모이가 줄어드는 걸 보고 미스 윌킨슨은 비둘기가 모이를 먹는가 보다 생각했지만 사실 비둘기는 모이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쥐 부인은 음식 부스러기를 찾아다니다 새장 안의 맛있는 모이를 봤다. 배가 고팠던 그녀는 비둘기가 무서웠지만 몰래 새장에 들어가서 모이를 꺼내갔다. 그리고 둘은 곧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쥐 부인은 완두콩을 가져가게 놔두는 비둘기가 이상했다. 그래서 물이라도 좀 마셔보라고 했더니 비둘기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이슬, 이슬, 이슬.


쥐 부인은 이슬이 뭐냐고 물었다. 비둘기는 이른 아침에 잎사귀와 풀에 맺혀서 반짝이는 이슬 이야기를 해주었다. 숲 속에서의 밤과, 짝과 함께 새벽빛 속에서 젖은 흙을 밟으며 쪼아 먹는 먹이와, 들판 위를 날아 이쪽 숲에서 저쪽 숲까지 날아가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쥐 부인이 물었다.


나는 게 뭐야?


비둘기가 깜짝 놀라며 그걸 모르냐면서, 나는 걸 보여주려고 날개를 펼쳐보려고 했다. 하지만 새장 창살에 부딪혀 날갯짓을 할 수 없었다. 비둘기는 횃대에 도로 주저앉아 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쥐 부인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뭉클했는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쥐 부인은 힘없이 축 쳐져 있는 비둘기를 위로해주고 싶어 자주 새장으로 찾아갔다. 비둘기는 쥐 부인에게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바람에 대해, 구름에 대해,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그러던 중에 쥐 부인은 둥지 한가득 아기 쥐들을 낳았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바빴다. 하필이면 남편까지 배탈이 났다.


쥐 부인은 며칠 만에 겨우 짬을 내 완두콩도 챙길 겸 비둘기를 찾아갔다. 그런데 비둘기의 상태가 너무 나빴다. '비둘기는 그녀 위로 두 날개를 내리고는 부리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네가 가버린 줄 알았어. 영영, 아주 영영."


쥐 부인은 한참 동안 비둘기와 함께 있어줬다. 그리고 집에 돌아갔더니 남편은 화가 나서 '그녀의 귀를 물어뜯었다.' 그날 밤 쥐 부인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비둘기가 새장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쥐 부인은 비록 생쥐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비둘기가 느끼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바닥을 돌아다닐 수 없다니! 들락거릴 수도 없고, 창고 벽을 타고 올라가 치즈를 가지러 갈 수도 없다니! 요리조리 다니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고 줄달음도 못 치다니! 뼈마디가 뻣뻣해지고 냄새도 못 맡고 소리도 못 듣고 아무것도 못 보고 수염이 둔해질 때까지 저 안에 앉아있어야 하다니!


쥐 부인은 심장을 두근대며 살금살금 쥐구멍에서 나와 몰래 새장으로 갔다. 미스 윌킨슨이 걸쇠를 내려서 문을 여는 걸 봤던 쥐 부인은 걸쇠를 이빨로 물어서 내렸다. 새장 문이 홱 열렸고 비둘기는 그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 날개를 퍼덕거렸다. 쥐 부인은 걸쇠를 이로 꽉 문 채 소리쳤다.


빨리! 빨리 나가!


비둘기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새장을 나와 창문 밖으로 펄럭, 날아갔다. 저 멀리, 나무 우듬지들 너머 저 멀리로. 쥐 부인은 비둘기를 바라보며 좁쌀만 한 눈물을 똑 떨궜다. 그리고 다시 창문 밖을 쳐다보는데...


별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쥐 부인은 이제 '비둘기 없이도' 아주 멀리, 꽃밭보다 멀리, 숲보다 더 멀리, 아주 멀리 있는 나무들 너머에서 빛나는 별들을 볼 수 있었다.


미스 바버라 윌킨슨은 그다음 날 아침에 새장이 비어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지만 범인이 아주 작은 생쥐라는 사실은 몰랐다.




이 그림책은 단순히 쥐와 비둘기의 우정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물론 둘의 모습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답다. 아주 낮은 세계만을 알고 있는 쥐와 아주 높은 세계 속에서 사는 새 사이에서도 사랑과 우정은 피어난다. 아니, 우정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보다 연민과 공감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생명과 생명의 유대이고 부드러운 감정이다. 그것은 존재 깊숙한 곳까지 느끼는 이해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읽힐 수도 있다. 집안의 세계와 집 밖의 숲과 들판과 밤하늘이 있는 세계가 상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된다. 쥐 부인이 집안의 세계에서 결핍을 느끼며 다른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하나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나의 현실에서 정신적인 결핍을 느낄 때 나는 내 결핍을 채워줄 어떤 것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 모험은 때로 위험해서 '살금살금' 걸어 다녀야 하고 때로는 '귀를 깨물릴' 수도 있다. 내가 꿈꾸는 다른 세계는 나를 치명적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밤하늘의 별'을 보여줄 수 있는 귀한 것이기도 하다. 이쪽 세계에만 머물면 나는 영영 결핍된 채로 살아야 하고 저쪽 세계로 넘어가려면 내 삶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


두 세계가 위태롭게 부딪히고 있을때  쥐 부인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비둘기는 새장 안에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비둘기의 구출과 해방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현실의 내 삶을 위해서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할 것은 (둥지 한가득 예쁜 아기들의 엄마라는) 내 역할이나 (집쥐라는) 내 처지가 아니라 (새로 상징되는) 나의 영혼이라는 뜻일까?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좋은 문학작품은 다만 질문을 할 뿐,  대답은 나의 몫이다.




* 가와이 하야오의 <어린이 책을 읽는다>에 이 작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융 분석심리학적 해석을 알고 싶으신 분은 이 책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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