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한 식물이 있습니다. 바질입니다.
바질의 잎사귀를 보세요. 날아갈 듯 휘어진 잎사귀가 보이시나요? 약간 갸름하게 시작되어 살짝 부풀어 오르다가 맵시 있게 빠져나가는 저 곡선이란! 경쾌하고 다정하게 선을 그리며 뾰족하게 끝을 내는 황금 곡률입니다. 어린잎들이 반질반질 윤기 있게 차례로 등장해 춤을 추네요.
바질의 키는 땅에 붙을 만큼 낮지도 않지만 다른 식물을 그늘로 덮을 만큼 높지도 않습니다. 바질은 이웃을 침범하지 않는 적절한 높이를 지향합니다. 은둔적이지도 않고 사교적이지도 않은 원만한 품성을 지녔습니다.
바질의 색은 연두에서 시작해서 초록으로 천천히 나아갑니다. 짙푸르지도 여리지도 않은 어느 지점에서 빛납니다. 부드러운 초록빛, 그 자체입니다. 바질의 빛깔에는 고유한 이름이 있어요. 바로 '바질 초록'입니다.
귀여운 십 대처럼 보이는 바질입니다. 실은 봄부터 자란 성숙한 바질인데요. 줄기를 올리며 잎사귀를 펼치는 모습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기품이 넘칩니다. 바질은 공간 속에 어느 만큼의 자리를 차지할지 숙고합니다. 잎사귀를 얼마나 펼치면 가장 아름다운 형태가 될지를 현명하게 가늠합니다. 바질의 안목은 훌륭합니다.
바질의 향을 아시나요? 어디선가 향이 퍼질 때, 아, 이건 바질이구나, 알 수 있어요. 독특한 자신만의 향이 있습니다. 살짝 진한 향이죠. 하지만 너무 진하진 않아요. 바질은 적정선을 지킬 줄 압니다.
바질은 존재 자체가 적절합니다. '너무'라고 할 게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게 맞춤합니다. 맞춤한 색깔과 맞춤한 키와 맞춤한 잎사귀와 맞춤한 향기를 갖춘 완벽한 식물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문제가 있어요. 저희 밭에서 잘 안 자라요! 자꾸 실패합니다. 작년에도 실패했고 올해도 실패 중입니다. 봄에 심은 바질 하나가 김장 무 속에서 저렇게 어렵게 버티고 있네요.
한 달 전에 심은 모종 스무 개는 모두 망했고, 봄에 심은 바질들은 보잘것 없습니다. 유난했던 올여름의 끓을 듯 뜨거웠던 열기를 견딜 수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다른 밭에서는 근육질을 뽐내며 자라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잎사귀며 품새가 하도 왕성하고 힘차서 바질이 아닌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라인더에 바질 잎사귀를 듬뿍 채워 넣고, 땅콩이나 아몬드나 호두 그리고 올리브유를 부어 넣은 다음, 소금을 살짝 가미해 곱게 갈아 바질 페스토를 만드는 게 봄부터의 제 계획이었는데요. 텃밭의 시간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에도 계획은 그냥 계획으로만 남아있습니다. 바질페스토를 작은 병에 담아서 냉동기에 차곡차곡 재워놓고 겨울 내내 곶감 빼먹듯이 하나씩 빼먹을 생각이었는데요.
길어야 두 달 남짓한 이 가을 초입에 다시 어린 바질을 심습니다. 바질은 추위에 약하다는데, 지금부터 뭘 얼마나 더 키울 거라고, 애정인지 집착인지 모를 미련 때문에, 또다시 사다 심은 이 어린 모종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식물이 없는데, 이 완벽함을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저의 편애는 운명의 장난으로 인하여 안타깝게 어린 모종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김장배추와 김장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배추가 한우보다 비싸졌다네요. 이런 금싸라기 배추를 봤나!
이번주의 텃밭 기록을 합니다:
9월 23일: 시금치 씨를 파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