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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Sep 18. 2024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고도를 기다리며> 텃밭편


(아침.)



호박: 너로구나!

오이: 그래서?

호박: 다시 만나니 반가워서. 떠나버린 줄 알았거든.

오이: 나도 그래.

호박: 우리가 다시 만난 걸 어떻게 축하한다? (잠시 생각하고서) 일어나, 껴안아줄게.

오이: (짜증스럽게)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호박: 친구야, 내가 이런 얘길 들었어. 두 친구가 있었대. 우리 같은 두 친구. 걔들이 누굴 기다렸다네, 그것도 엄청.

오이: 왜?

호박: 몰라. 그게 참, 웃기더라. 누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대.

오이: 헐...

호박: 가만히 듣고 있는데, 뭔가 귀를 잡아끄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재밌더라고.

오이: 어디서 들었는데?

호박: 사람들한테서. 자기들끼리 떠드는데 내가 듣는 줄 몰랐겠지.

오이: 오호.

호박: 그 두 친구가 기다린 건 고도라나 뭐라나. 이름도 얘길 하다가 기억해 냈대. "그자 이름이 고돌 걸?" 이케.

오이: 또 한 번 헐이다!



호박: 기다리기만 하니까 얼마나 지루했겠니. 배도 고프고 말야. 그래서 순무도 먹고 당근도 먹었다는구나.

오이: 오이 먹었단 얘긴 없구?

호박: 다행히. 호박 얘기도 없더라. 하긴 호박은 쌩으로는 못 먹지. 오인 먹지만.

오이: ...

호박: 근데 묶여 있는 기분이더래. 아무도 묶어놓지 않았는데 그런 기분이 들더라는 거야.

오이: 흠, 우리랑은 사정이 다르네. 우린 묶여있잖아.


(오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오이: (화난 목소리로) 걔들 멍청이 아니냐? 안 묶였는데 묶인 기분이라니!!!

호박: 듣고 보니 그러네. 잊어버려. 잊어버리자. 그게 정신건강에 좋아. 우린 안 묶였다, 우린 안 묶였다...

오이: (이마를 찡그리며)... 묶였는데, 묶였는데...



호박: 가만 있자... 내가 뭘 잊은 거 같은데... 뭐지?

오이: 뭐? 뭘 잊어?

호박: ... 모르겠다, 잊어버렸네. 하던 말이나 계속할까?

오이: 그러지 뭐.



호박: 중요한 얘긴 지금부터야. 당근을 먹다가 한 친구는 그걸 먹을수록 맛이 없어진다고 느꼈고 다른 한 친구는 먹을수록 맛이 난다고 느꼈대!!! 그럴 수 있니? 당근 맛이 당근 맛이지 어떻게 맛이 변해?

오이: 맛은 변하는 거야... 너 그걸 몰랐단 말야?

호박: 기분 문제 아닐까?

오이: 성격 문제겠지.

호박: 성격 문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오이: 그건 타고난 거니까.

호박: 꿈틀거린다고 별수 있겠어?

오이: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 거지.

호박: 별수 없는 거야.

오이: 근데 당근은 다 먹었대? 순무는?

호박: 몰라. 사람들이 말을 뚝 끊더니 느닷없이 배추에 열을 내는 거야. 달팽이가 다 먹어치웠다고 말이야. 사람들은 뭐가 중요한질 모른다니까. 한심도 하지.


(침묵)



오이: 우리가 이렇게 같이 붙어 있은 지가 얼마나 되지?

호박: 모르겠다. 한 오십 년?

오이: 내가 여기 왔을 때 니가 이미 거기 있었지. 기억난다. 나한테 니가 손을 흔들었지.

호박: 다 지나간 얘기다. 그날 바람이 불었던 게 기억난다.

오이: 나도 손을 흔들었는데. 바람이 불었던가?


(침묵)



호박: 그런데 그 친구들 말야, 고도를 만났을까? 고도가 왔을까?

오이: 그러게… 고도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지네…

호박: 맞아, 궁금해… 고도야! 고도씨! 고도쌤!

오이: 고도가 꼭 사람이란 법 있어? 새나 개나 고양일지도! 파리나 나빈지도!

호박: 맞네 맞아… 고도새! 고도냥! 고도비!

오이: 효... 한번 만나보고 싶네... 나 일하러 가야되는데...

호박: 나도...



(둘 다 움직이지 않는다.)



"베케트 작가님, 죄송합니다만, 텃밭에서 호박과 오이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도가 누군지 좀 설명해주십시오. 누군지도 모를 고도를 기다리느라 얘네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다."  

텃밭주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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