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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Oct 06. 2020

부루퉁한 마음

<부루퉁한 스핑키>  윌리엄 스타이그 글/그림


여기 이 아이, 스핑키는 잔뜩 화가 났다. 엄마, 아빠, 누나, 형 때문에, 막내이기 때문에. 물론 막내가 아니라도 아이들은 화를 내지만 유난히 스핑키에게 공감이 되는 까닭은 나 역시 막내였고 그래서 막내의 처지를 대강은 알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마흔 중반의 엄마: 내가 옛날에 미용실 안 했나. (엄마는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셨다.)

-열두어 살 큰 언니: 그랬지.

-열 살 무렵 작은 언니: 응, 맞아. 몰랐지?

-대여섯 살의 나: 와, 진짜로?

(세 사람의 소리 없는 키득임과 음흉한 눈빛 교환...)


여섯 살, 네 살 위의 두 언니와 엄마는 종종 작당해서 나를 놀렸고 나는 곧잘 속았다. 어렸고 어리숙했기 때문에 그랬기도 했지만 3:1은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사소한 장난에 불과했지만 속았다는 걸 알면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이런 장난과 별도로 나는 어쩐지 모두에게서 소외되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가족들 가운데 가장 약하고 세상사에 대한 지식도 제일 모자라서 왠지 바보 같다는 느낌, 소외된다는 느낌 같은 것들은 알게 모르게 무력감을 키워서, 성인이 되어서도 아주 오랜 기간 '나는 무능하다'는 생각을 마치 절대 항진 명제처럼 내 안에 담아두고 살았던 것 같다.

 

스핑키는 대략 여덟 살, 아홉 살쯤 됐을까? 사실 별일도 아닌 일에 잘 삐칠 나이이기도 하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툭하면 화를 낸다. 아마도 자의식이 본격적으로 싹트는 나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의식은 아직 연약해서 쉽게 상처를 받는다. 아이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 화를 '내야만' 하고 '낼 수밖에' 없다. 아이는 자신을 위협하는 유형무형의 적들과 항시 대치해야 하는 고독한 전사인 셈이다.  


우리의 전사 스핑키는 이 이야기 속에서 실컷 화풀이를 한다. 형과 누나와 엄마가 아무리 빌고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그들의 호의를 내팽개치면서 말이다. 무릇 화풀이라 함은, 이렇게 실컷, 과할 정도로 실컷, 해야 한다. 이 점에서 윌리엄 스타이그의 현명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장장 29쪽에 이르는 동안 아이에게 복수할 기회를 무궁무진하게 제공하고 나서 단 3쪽으로 상황을 마무리해버린다. 말하자면, 아이에게 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화를 낼 수 있게끔 어드밴티지를 넉넉하게 베푼 것이다.  


살아보니, 마음의 앙금을 풀어내려면 실제 경험했던 부당함에 대해 딱 그만큼만 되갚아주는 것으로는 모자란 듯싶다. 밉살스러운 누나가 꽃을 따주고(팽개쳐버릴 꽃을), 거만한 형이 무릎을 꿇고(백번을 꿇어도 용서 못할 테지만), 사랑하는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차려줘도(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더 서운한 엄마) 끝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복수는 유혹적이다.  


윌리엄 스타이그는 스핑키를 심하다고 할만치 편애해서 아이가 원하는 만큼 복수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것은 그림책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실제 가족들은 스핑키의 가족들보다 냉정하니까. 설사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해도 가족 가운데 한두 명쯤은 쌀쌀맞거나 인색하거나 무심하다. 그러니 작가는 그림책 속에서나마 후련하게 화풀이를 할 수 있게 멍석을 펼쳐준 것이다. "바깥세상에서는 이렇게까지 못하지. 아무렴. 여기서나 실컷 화풀이 해. 난 네 편이야." 하면서. 누구는 그랬다, 편애란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속이 후련하게 보복을 한 스핑키는 이제 마음이 누르러졌다. 물이 넘치기 직전, 한 방울만 더하면 넘치는 임계점 직전, 파국 직전에 말이다. 식구들은 인내심이 바닥나서 이제 내일 아침이면 슬슬 약이 오를 참인데, 이 미묘한 순간에 스핑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식구들이 잘 몰라서 그랬는지도 몰라. 지금은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식구들이 나한테 그렇게 군 게 꼭 식구들만의 잘못일까? 


화를 풀면서도 우스운 꼴이 되지 않으려고 스핑키가 어떤 화해 상황을 연출했는지를 보면 흐뭇하다. 이 이야기가 후련한 복수 이야기이면서도 따뜻한 이유는 바로 이 부분 때문인 것 같다. 자기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아이가 베푸는 너그러움 말이다. 식구들이 어쩌면 잘 몰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마음은 어린아이임에도 얼마나 관대한지. 예수님도 그랬다지 않은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윌리엄 스타이그는 우리가 언제 너그러워지는지 잘 아는 것 같다. 아이들은(아니, 사람은)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 너그러워진다. 하루 삼시세끼 밥을 먹어야 몸에 활기가 있듯, 적당히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리고 삼시세끼 밥이 굳이 진수성찬일 필요가 없듯, 사랑과 관심도 그리 대단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사소한 배려 정도면 되지 않을까? 산다는 게 배가 '고프고 부르고'의 연속이듯이 사랑 역시 '고프고 부르고'의 연속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가 마지막 장에서 여운을 남긴 것은 이런 생각에서였을까? 


그다음부터 식구들은 스핑키를 훨씬 더 세심하게 배려해주었지요. 그게 그리 오래 못 가는 게 탈이지만.    


사랑을 너무 대단하고 위대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시어가는 김치, 어제 먹다 남긴 찌개, 살짝 탄 멸치볶음, 눅눅해진 김... 오늘 밥상에 올라온 이 반찬들도 정갈하게 접시에 담아 따뜻한 밥에 얹어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면 진수성찬 못지않게 맛있다. 소박한 생활 밥상이라고 할까. 사랑도 이렇겠거니, 생각하고 싶다. 한없이 자비로운 사랑, 얼음산을 넘어 눈바람을 뚫고 약초를 구해오는 효심... 같은 어마 무시한 사랑은 받기도 힘들고 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또 누군가는 그랬다, 예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로 자식을 사랑하라고. 부모로서 그런 사랑을 꿈꾼다. 자식으로서 그런 사랑을 원했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내 사랑(내가 받았고 내가 줄 수 있는)이 초라해진다면, 그런 꿈은 가끔은 잊어버려도 좋겠다.   


서운하면 부루퉁해져도 괜찮다. 그럴만하니까.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고약하니까. 하지만 나도 은근 이기적이고 고약할 때도 많고, 사람들은 어딘가 빈구석이 있어서 안쓰러울 때도 많고, 당장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리 큰일이 아닐 때도 많고... 마음을 풀고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게 사람 마음인 것 같다. 마음 안에 이기적이고 고약한 씨앗이 있다면 너그럽고 인자한 씨앗도 있을 거라고, 속는 셈 치고, 손해 보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보는 거다. 잘 안 되지만 그래도. 무엇보다도 부루퉁한 마음은 내 위에 검은 구름을 모아서 비를 쏟아붓는다. 우산으로 받쳐도 온몸이 쫄딱 젖는 그런 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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