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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를 뚫고 나가는 나

by 스프링버드


샐리,


오늘도 안녕했니?


윌리엄 스타이그 글/그림, 김영진 옮김, 비룡소, 2024(1판12쇄)




여자아이가 눈보라 속에서 큰 상자 하나를 들고 가고 있어. 상자 속에는 드레스가 들어있지. 아이의 엄마가 만든 옷이야. 여자아이의 이름은 아이린. 아이린은 용감하지. 이 이야기는 아이린이 어떻게 용감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아이린의 엄마 바빈 부인은 옷을 만드는 사람이고, 공작부인이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방금 전에 완성했어. 무도회는 바로 오늘 저녁이야. 그런데 바빈 부인은 옷을 갖다 줄 수 없을 정도로 병이 깊이 나버렸지 뭐니. 큰일이 난 거야. 그때 아이린이 말했어. 자기가 가겠다고. 바빈 부인은 말렸어. 옷상자가 아이린이 들고 가기에는 너무 크고 길도 멀었거든. 게다가 밖에는 지금 눈이 오기 시작했어. 하지만 아이린은 고집을 부렸지. 엄마가 만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드레스'를 쓸모없게 만들 순 없었으니까 말이야. 아이린이 얼마나 엄마를 아끼는지 볼래?


아이린은 바빈 부인을 달래 침대에 누여드렸어요. 누비이불을 두 장이나 꼭꼭 덮어 드리고, 발치에는 담요까지 하나 더 얹어 드렸어요. 그런 뒤 꿀을 넣은 레몬차를 끓여 놓고, 난로에 장작도 한가득 집어넣었지요.




아이린은 옷을 단단히 껴입고, '열이 펄펄 나는 바빈 부인의 이마에 뽀뽀를 여섯 번이나 하고도 한 번 더' 하고 나서 밖으로 나섰어. 밖은 정말로 추었어. 눈이 쉬지 않고 내렸고 길은 멀고도 험했지. 바람이 매섭게 불어 눈발이 흩날렸어. 아이린은 화가 나서 외쳤어.


야, 바람! 너 이제 그만 좀 해!



하지만 바람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몰라. 나뭇가지를 부러뜨려서 내던지고 땅에 쌓인 눈을 퍼 올려서 허공에 마구 흩뿌렸지. 바람은 아이린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았어. 하지만 아이린도 물러서지 않았어. 뒤로 돌아서서 등으로 바람을 밀면서 계속 걸어갔지. 아이린은 '입술을 꼭 깨물고 더 부지런히' 걸었어. 이건 '정말 중요한 심부름'이었으니까.


아이린과 바람은 말싸움을 했어.


"집으로 가라, 아이린! 집으로 돌아가란 말이다아아아..."

"싫어! 난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 못된 바람아!"

"집으로 돌아가라니까아아아아!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니까아아아아. 내 말 안 들었다가는..."


아이린은 바람이 하는 말을 들을까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곧바로 마음을 바로 먹었어. "아니야, 안 돼!" 하고. 아이린과 바람은 계속 싸웠어. 바람은 아이린의 손에서 상자를 뺐으려고 했고 아이린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 그런데 그만 바람이 이겨버렸네. 바람은 상자를 낚아채서 심술궂게도 상자 뚜껑을 홱 열어젖혔지 뭐야. 무도회 드레스가 너풀너풀 일어나 빙글빙글 춤을 추며 날아가 버렸어.





어쩌지? 아이린은 '눈물이 솟구쳐 속눈썹이 얼어붙어'버렸어. 아이린이 그때 한 말이 뭔지 알아?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겨우 이렇게 날려 보내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재고, 자르고, 시침질을 하고, 한 땀 한 땀 꿰맸단 말이야? 공작부인은 또 어떻고? 가엾은 공작부인!




아이린은 결심했어. 빈 상자라도 들고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죄다 말씀드리기로. 결국은 공작부인의 집에 겨우 도착했는데 그 과정은 고난의 행군이었어. 눈은 끝없이 내려 점점 깊이 쌓이고, 바람은 울부짖고, 구덩이에 발이 빠져서 발목까지 접질렸지. 세상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게 온통 하얗게 변했고, 날은 저물어 캄캄해졌어. 아이린은 아무도 없는 밤에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어. 끝내 아이린은 미끄러져서 온몸이 눈 속에 파묻히고 말았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지. 아이린은 생각했어.


그래, 그냥 이대로 얼어 죽자. 그럼 이 고생도 끝이잖아?


하지만 아이린은 또 마음을 고쳐 먹었지. 그렇게 되면 엄마를 못 본단 생각이 들었거든.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는' 사랑하는 엄마를 말이야. 아이린은 갑자기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팔다리를 마구 휘저어서 눈구덩이에서 빠져나왔어. 그리고 결국에는, 끝내는, 마침내, 드디어, 공작부인의 집에 도착했어. 그리고 기적적으로 무도회 드레스도 찾았어. 드레스가 공작부인 집 근처 나무를 꼭 끌어안고 있더란 말이지!


다 잘 끝났어! 정말 행복하게 말이야. 새 드레스를 입은 공작부인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웠고 아이린도 '빛나기는 마찬가지'였어. 아이린은 공작부인의 눈썰매를 타고 집으로 잘 돌아갔고, 푹 자고 일어난 바빈 부인도 몸이 한결 가뿐해졌지.




나는 가끔 아이린을 생각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린이 가끔 나를 찾아와. 용감하게 눈보라 속을 뚫고 걸어가는 아이린이 말이야. 엄청 춥고 매서운 바람이 눈발을 날리는 속으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여질 때, 바람이 하라는 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마음이 흔들릴 때, 지금 여기가 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낙심할 때, 길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마음이 캄캄할 때, 춥고 외로울 때, 길을 잃었을 때, 나 같은 약한 인간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절망할 때, 그래 그냥 이대로 얼어 죽자 싶을 때, 그럴 때, 나는 아이린처럼 계속해서 걸어가곤 했어. 물론 아닐 때, 도망치고 포기할 때가 훠-얼-씬 더 많았지만.


아이린이 포기하지 않게 이끌었던 건 뭘까? 출판사는 '약속의 소중함과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는 아이린의 용기'라고 했지만, 아이린의 마음 깊숙이 더 들어가 보면 약속보다 더 소중한 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아. 그건 바로 사랑하는 엄마를 아끼고, 착한 공작부인을 아끼는 마음 아닐까 싶어.


그런데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아이린은 그랬는데, 나를 계속해서 걸어가게 만들었던 건 뭐였을까? 나는 누구를, 무얼, 아꼈던 거지? 그건 아직까지도 내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야.



* 인용한 그림들은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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