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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게 살아가는 시간들

by 스프링버드


샐리,


오늘은 아주 섬세하고 고운 인물을 소개하려고 해. 정확하게는 '섬세하고 고운 털옷'을 입은 인물이야.


땃쥐 실물은 경남 창녕의 누리집에 실린 사진입니다.



귀엽지? 얘는 땃쥐야. 그림책 작가가 독일의 어느 숲에서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이 쥐를 만났는데 오래 기억에 남아서 땃쥐를 주인공으로 그림책을 만들었대.




미야코시 아키코 글/그림, 박선형 옮김, 문학동네, 2024.


작가는 책 첫 장에서 주인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


여기 성실하게 살아가는 땃쥐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그림책 작가처럼 숲에서 땃쥐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우리도 작가라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땃쥐를 주인공으로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까?


섬세하고 고운 털옷을 입은 이 작은 포유류는 몸무게가 20그램 정도밖에 나가지 않고 먹이를 못 먹으면 24시간 안에 죽는다고 해. 심장이 엄청나게 빠르게 뛰고 에너지를 빨리 소비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래서 사냥은 땃쥐에게 생존과 직결되는 절박한 일이야. 보통은 곤충이나 달팽이나 지렁이 같은 걸 사냥하는데, 종류에 따라서는 쥐나 개구리나 뱀 같은 작은 척추동물까지 사냥하고 독을 분비할 정도로 공격성이 강한 땃쥐도 있다는구나. 아마도 이 공격성은 절박함에서 나오는 생존 본능이 아닐까 싶어. 땃쥐 수명은 1년에서 3년이고, 눈이 작고 시력이 매우 나빠서 음파를 탐지하는 감각으로 사냥감을 찾는다고 해.


외모만 보면 순하고 평화로운 동물 같지만 속사정은 그리 편안하진 않네. 너무 빨리 뛰는 심장, 너무 빠른 에너지 소모, 너무 작은 덩치, 너무 나쁜 시력, 너무 많은 천적... 숲은 너무 크고 세상은 너무 험하고 땃쥐는 너무 여리고 작아. 아기 손톱 같을 작은 두 귀와 발그레한 코, 보드라운 털. 땃쥐의 속사정을 고려하면서 작가인 우리는 각자 무슨 이야기를 상상할까?


이 땃쥐를 모험가로 만들어볼까? 부엉이를 혼내주고 뱀을 골탕 먹이는 용맹한 용사는 어때? 아니면 천재 땃쥐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를 지어볼 수도 있겠지. 어쩌면 사람들을 웃기는 재기 발랄한 코미디언도 괜찮을 것 같고, 모두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멋진 가수를 시켜도 어울릴 것 같아. 아무튼 세상을 이기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림책 작가 미야코시 아키코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땃쥐를 상상했어. 섬세하고 고운 털옷처럼 섬세하고 고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작은 땃쥐를 그려냈지.


땃쥐의 하루는 아침 여섯 시에 시작해. 자명종이 울리면 잠자리에서 나와 먼저 화장실에 다녀오고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뒤에 꿀비스킷 세 개를 아침으로 먹어. 비스킷 봉투는 다시 잘 여며서 식료품 바구니에 넣어두고, 점심과 손수건을 가방에 챙기긴 뒤에 털을 반질반질하게 빗질해. 마지막으로 목도리를 두르고 빠뜨린 게 없는지 살핀 다음, 일곱 시 정각에 집을 나서. 지하철에는 늘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회사에 도착하면(외국 돈을 일본 돈과 교환해 주는 환전소가 직장인 것 같아) 머그잔에 커피를 한 잔 가득 마시고, 책상을 깨끗이 닦은 뒤 일을 시작하는데 땃쥐는 야무져서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자주 들어. 열두 시 오 분 전에 땃쥐는 일을 잠시 멈추고 직장 동료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옥상에 올라가 사과를 먹으며 혼자만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 그리고 오후 일을 시작해서 다섯 시 사분 전이 되면 오늘 일한 데까지 표시를 해두고 다섯 시 정각에 퇴근해. 퇴근길에 단골 빵집에 들러서 빵을 사는 게 땃쥐의 작은 즐거움이야. 그날 사 온 빵을 우유에 적셔 먹으면 간단히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일기 예보가 시작되기 이분 전 일곱 시에 라디오를 켜서 아늑한 시간을 즐기다가 정확히 아홉 시 반이 되면 잠자리에 들어. 이걸로 땃쥐의 하루 끝.




땃쥐의 일주일도 규칙대로 돌아가. 월요일은 빨래, 화요일은 체조, 수요일은 다리미질, 목요일을 루빅큐브, 금요일은 악기연습,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일주일치 요리를 해. 이렇게 일주일이 쌓여서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끝나가는 겨울이면 두 친구와 파티를 하지. 일 년에 딱 한번 만나는 친구들이야.



땃쥐6.jpg



어때? 이런 땃쥐 이야기도 가능해. 하찮다고? 너무 지루하다고? 창의성도 없고 모험도 없고 위대한 일도 하지 않고 멋지지도 않다고? 어쩌면. 하지만 주인공 땃쥐는(그림책 작가는) 아니라는데? 땃쥐가 오늘은 처음으로 루빅큐브를 다 맞췄다는 걸. 올해 겨울에는 두 친구와 맛있는 걸 먹고 못했던 얘기를 나누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걸. 금요일마다 연습했던 곡을 친구들 앞에서 연주하고 친구들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정말 행복했대. 땃쥐는 두 친구가 떠나고 고요해진 집안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생각했어.



좋은 한 해였어.




그림책 작가는 땃쥐를 이렇게 소개했지. "여기 성실하게 살아가는 땃쥐가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땃쥐의 하루가 아무 특징 없이 너무나 지루할 수도 있어. 어제 걸었던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내 발자국 위를 그대로 포개는 것 같은 일. 같은 일의 반복. 매일 먹는 똑같은 빵과 사과. 매일 하는 똑같은 인사. 반복에 반복에 반복.


반복적인 일과 정해진 일과에 대해서 사람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른 것 같아. 유독 그런 걸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어 보이거든. 땃쥐는 아마도 정해진 일과를 하면서 편안해하고, 그 속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아. 금요일마다 악기 연습을 해서 연말에 친구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목요일마다 루빅큐브를 연습해서 마침내 큐브를 다 맞춰낼 수 있게 된 걸 기뻐하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축복 아니니?


좋든 싫든 우리는 대체로 반복적인 일과를 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 같아. 네가 말했지, 학교 가기 싫을 때가 있다고. 어쩌면 학교 가기가 '무지' 싫을 때가 '너무' 많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나도 그랬던 것 같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지. 어른이 되면 뭘 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십 대의 나는 나의 부자유가 너무 부자유스러웠어.


하지만 정해진 일과를 묵묵히 해내는 것, 반복적인 생활이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아. 하루하루가 쌓여서 만들어내는 묵직함이랄까, 힘이랄까, 뭔가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잘 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매일의 연습이랄까, 정해진 궤도를 달리면서 붙는 가속도의 강력함이랄까. 그림책 작가는 땃쥐의 성실함 속에 스며있는 그런 가치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 혹은, 아주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일, 아무 욕심 없는 태도, '그저 할 뿐'이라는 소박한 마음을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파도에 쓸려서 동그랗게 닳은 초록 유리조각이 해변에서 햇빛 아래 반짝일 때 그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듯, 나는 우리의 일상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참 아름다워 보여. 욕심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사람, 어제의 일을 오늘도 반복하며 사는 사람, 마음을 비우고 지금 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을 보면 존경심이 생겨. 아주 성실했던 한 화가를 떠올리기도 해. 밭을 일구는 농부처럼 캔버스를 일군다고 했던, 실제로 그렇게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던 화가. 거창하고 대단한 것 대신 내가 일굴 밭, 내가 그릴 캔버스에 온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는 땃쥐에게서 봐.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땃쥐가 조금 안쓰럽기는 해. 너무 똑같은 생활 속에서 지쳐갈까 봐. 땃쥐는 어느 주말에 옆 동네로 산책을 갔다가 벼룩시장에서 낡은 텔레비전을 보고는 마음을 빼앗겼어. 돈은 안 가져왔는데 텔레비전이 너무 갖고 싶었지. 그때 텔레비전 주인이 땃쥐의 멋진 목도리를 마음에 들어 하면서 돈 대신 그걸 갖겠다고 한 덕분에 땃쥐는 목도리를 풀어주고 (추위에 떨면서) 텔레비전을 집으로 가져와 먼지를 닦아내고 전원을 켰어. 그러자 새까만 화면에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어. '눈부시게 푸른 바다. 끝을 알 수 없는 넓고 넓은 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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땃쥐는 생각해. '언젠가 저 바다에 갈 수 있을까?' 그림책 작가는 땃쥐를 위해 이야기를 열어놓았어. 땃쥐는 차근차근 착실하게 악기를 연습해서 곡 하나를 온전하게 연주해 내고 큐브도 결국 맞춰내니까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갈 것 같지 않니? 작가가 땃쥐를 아주 사랑하고 굳게 믿는 게 나는 느껴지는 걸.


땃쥐의 작은 가슴이 남쪽 섬나라를 향한 꿈으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나도 땃쥐를 응원해. 성실한 땃쥐야, 그 꿈을 꼭 붙들어! 넌 꼭 저 바다에 갈 수 있어!




* 인용한 그림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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