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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Jan 18. 2021

전통을 향유하다

'내가 처음 가 본 그림 박물관 시리즈' 중  <산골짝 이야기> 


출판사 길벗어린이에서 펴낸 "내가 처음 가 본 그림 박물관" 시리즈는 1995년에서 1997년 사이에 펴낸 6권의 그림책으로 구성되었다. 무려 20년도 더 되었다. 책이 아무리 좋아도 독자들이 찾아주지 않거나 출판사 사정이 나빠지면 절판될 수 밖에 없는데, 혹시나 하고 온라인 서점에 확인해보니 아직도 건재하다!


요즘의 그림책들은 경쾌하고 발랄한 만화풍의 그림체가 많고, 언뜻 음산해 보이기까지 하는 추상화풍의 그림들도 보이며, 회화적인 작품들도 꽤 있다. 한마디로, 아주 다양하다. 그래서 그림 박물관 시리즈는 언뜻 구태의연해보일 위험이 있다. 전통 예술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오래전에 사두었던 이 그림책을 책꽂이에서 꺼내 다시 펼쳐 드는 순간, 새롭고 황홀한 세계가 펼쳐졌다. 너무나 환상적인 세계가.


비문학 장르도 판타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그림책 시리즈를 보며 알았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젊은 엄마들이 자녀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고를 때는 다분히 학습적인 면을 고려하는 것 같다. 최소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책들을 고른다. 하지만 '좋은 것'과 '재미있는 것'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둘을 다 만족시키지 싶다.


이 시리즈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 미술작품을 적절하게 잘 선택했다. 사용된 그림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길만한 친근하고 재미있으며 소박한 것들이다.

- 구성이 뛰어나다. 그림과 문장을 파격적이다 싶으리만치 자유롭게 배치해서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예상을 벗어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그림과 글의 율동미를 잘 살려냈다. 그림과 글이 마치 음표처럼 톡톡 튀어 올라서 눈동자가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이느라 바쁘다. 하지만 이 움직임이 전혀 산만하지 않다. 그림과 글이 고도의 계산 하에 배치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독자의 시선이 머뭇거림 없이 순조롭게 물 흐르듯 나아갈 수 있다.  

- 눈도 즐겁지만 글도 참 잘 썼다. 이건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 우리의 전통 미술은 낡고 시대에 뒤진 것으로 치부되어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것이라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 이전에 그 자체가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예술을 음미하는 안목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잘 기획된 이 그림책은 아이들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전통 예술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순전히 내 주관적인 생각인데, 여러분도 그림책을 보신다면 아마 의견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는 시리즈 중  <산골짝 이야기>(조은수 글, 문승연 꾸밈, 목수현 기획)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 옛날 깊은 산골짝에 연꽃 연못이 생겼다.

2. 이 연꽃마을에 호랑이가 살았다.  

3. 화가가 죽은 호랑이를 위해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중 첫 번째 부분은 이렇게 흘러간다:


옛날 깊고 깊은 산골짝에서

돌돌돌 물이 흘러내려와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었는데

연못은 몇 날이고 몇 달이고

가만히 고여 있기만 했지.

그러던 어느 날

이 연못에서 한 송이 연꽃이 살며시 피어났어.

한 송이는 두 송이

두 송이는 세 송이

세 송이는 네 송이

다른 송이를 불렀지.

(다음 장을 넘기면 연꽃이 핀 연못을 그린 펼친그림이 나온다. 가만히 그림을 보며 마음을 쉰다.)

연꽃이 피어나자 물고기가 놀러 왔어. (새로운 요소, 즉 물고기의 등장)

한 마리는 두 마리

두 마리는 세 마리

세 마리는 네 마리

다른 물고기를 불렀지.

물고기가 놀러 오자 새들이 날아왔어. (다시 새로운 요소, 새들의 등장)

작은 새는 큰 새를

큰 새는 흰 새를

흰 새는 검정 새를 불렀지.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을을 연꽃 마을이라 불렀대. (첫 번째 이야기의 매듭)


이야기는 산골짝의 물 -> 연못 -> 하나, 둘, 셋 늘어나는 연꽃 -> 하나, 둘, 셋 늘어나는 물고기(새로운 요소) -> 작고, 크고, 희고, 까만 새로 늘어나는 새(새로운 요소)로 점점 확대되어 나간다. 이렇게 이야기가 점점 부풀어나가면 그림책을 읽는 마음도 같이 부풀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고 또 앞서간다. 다음에는 어떤 내용이 나올까, 상상하면서.


깊은 산골짝에 연꽃이 피고 물고기와 새가 찾아오는 연못이 있다는 것으로 끝난 이야기의 첫 번째 부분은 '연꽃 마을이라 불렀대'로 매듭을 지었다. 그다음 이어지는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 골짜기에 호랑이가 산다는 새로운 화제가 등장한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토끼들은 호랑이에게 담배대를 가져와서 피워보라고 호랑이를 꼬신다. 그리고 포수가 등장해서 호랑이를 잡을 태세다. 이야기의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는 다시 새로운 화제가 등장하는데, 떠돌이 화가가 그 골짜기를 찾은 것이다. 화가는 포수가 매고 가는 호랑이 가죽을 보고 호랑이가 불쌍해서 그림으로 그려준다.


산골짝 이야기는 큰 이야기 속에 작은 이야기가 세 개 들어있는 셈이다. 그 각각은 독립적인 듯하면서 이어져있다. 이야기는 식물(연꽃) -> 동물(호랑이) -> 사람(포수와 화가)으로 확대된다. 앞에서 첫 번째 작은 이야기가 수와 질의 차원에서 확대되었듯이 큰 이야기도 이렇게 확대되면서, 파동이 겹치고 겹치며 파랑을 이루어 전체 이야기가 물결친다.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도 단조롭게 배치해놓으면 절인 배추처럼 숨이 죽어버릴 위험이 다분한데, 이 대목에서 편집이 빛을 발한다. 그림과 글자의 배치가 정말 신선하고 발랄하다. 그림과 글자가 마치 장난을 치는 것처럼 요리조리 장면 장면마다 예상을 벗어난 자리에서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것이 산만한 것처럼 보여도 통일성이 있다. 마치 잘 작곡된 음악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림책을 다 보고 나면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온 느낌이 든다.


우리의 전통색은 쪽색, 옥색, 수박색 등등 지금은 잊힌 색들이 참 많은데, 그림책 안에 전통색들을 교묘하게 잘 살려놓은 것도 세심히 보면 보인다.


앞부분 몇 장을 여기에 실어보고도 싶었지만 알라딘 서점에서 그림책 미리보기가 제공되지 않는 걸 보아 출판사와 저자들의 권리를 지켜드려야 할 것 같다. 앞표지와 뒤표지만 보여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전통예술이 무조건 옳지는 않다. 예술도 사람처럼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는 것 같다. 문화는 부단히 변화한다. 하지만 옛 문화 중에는 그냥 보내기 아쉬운 것들이 참 많다. 옛것을 붙잡는 마음은 미련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오늘은 옛날의 연장선이다. 그 선상에서는 오래된 향기가 풍기고 오래된 색깔이 번지며 오래된 이야기와 음악이 울린다.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향유할 수 있으려면 우선 익숙해져야 한다. 안목은 키워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너무나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것들로만 채워지는 것이 안타깝다. 옛날 것들이 우리를 잘 잡아주어야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며 현대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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