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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Jan 25. 2021

관계를 맺는다는 것

<위를 봐요> <하루거리> <명애와 다래>

코로나 때문에 거의 반 강제적으로 사람들과 멀어진 생활을 일 년 가까이 하면서, 성글어진 인간관계가 은근히 삶의 여백처럼 느껴져서 좋기도 했다.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람들과의 관계에 회의가 들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곱지 못하고 삐딱해졌다.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하는 일들이 피곤했다. 사람들을 탓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 탓이 컸다. 그래서 코로나의 일 년은 적어도 내게는 일종의 안식년이었다. 일 년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진 것 같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 속으로, 처음 마음으로.


<하루거리> 표지에는 두 아이가 마주 보고 있다. 오른쪽 아이의 이름은 순자, 왼쪽 아이는 분이다. 순자와 아이들(분이와 친구들)은 한 마을에 살지만 실제로는 다른 세계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순자는 부모 없이 큰아버지에게 더부살이를 하는 구박덩이여서 맨날 일만 하느라 보통 아이들처럼 논다는 건 '아주 딴 세상 얘기'다. 그런데 여기 한 아이가 순자를 가만히 쳐다본다. 분이다.


순자는 하루거리를 앓고 있다. 하루거리는 학질의 옛말인데, 가난하고 굶주리던 아이들이 앓던 병이었다. 하루 걸러가며 고열이 나면서 아팠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순자는 일을 하다가 열이 나면 우물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기도 하고 달구지 위에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기도 했다. 아이들은 "순자가 혹시 하루거리를 앓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분이는 순자를 약수터로 데리고 가서 물 할머니와 물 할아버지에게 빌어보라고 했다. "순자를 낫게 해 주세요." 하고 분이는 빌었는데 순자는 놀랍게도 다른 걸 빌었다. "죽게 해달라고 빌었어." 분이는 당황해서 친구들과 의논해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순자의 병을 고쳐주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불쑥 말한다. "치, 자꾸 아프면 약 먹고 죽어야지 뭐."


진짜 죽으라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하여간 참 놀랄만한 발언이다! 죽는 게 마치 밥 먹듯 별일 아니라는 듯한. 그래서 별일 아닌 것처럼 죽음에 가볍게 접근했는지도 모르겠다. 분이가 꾀를 냈는데, 순자가 정말 죽고 싶은지 알아보려고 친구들과 같이 박 씨를 잘 다듬어서 알약처럼 만들어 순자에게 준 것이다.  


"이거 먹으면 정말 죽는 거야."


순자는 약을 받아서 집에 갖고 가서 먹은 다음에 깜깜한 방에서 가만히 누워서 죽기를 기다렸다.


"야야. 너희들이 준 약 먹었는데... 안 죽어."


그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직접 보시기 바란다. 눈물이 핑 돌게 아이들이 예쁘다.  



<명애와 다래> 표지에도 두 아이가 나온다. 왼쪽은 명애, 오른쪽은 다래.  


다래의 엄마 아빠는 할머니 간병을 하느라 다래와 많이 놀아주지 못한다. 놀이공원을 가고 싶어도 할머니 때문에 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래는 할머니가 밉다. 다래는 화가 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다래는 할머니가 놀이공원에 가자고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 아빠가 피곤할 테니까 우리끼리 살짝 다녀오자며 할머니는 엄마가 할머니 드시라고 얼려놓은 홍시까지 챙겨 들고 있었다. 놀이공원으로 가는 길에 할머니는 다래를 업어주고 홍시도 먹여주었다. 놀이공원에서 다래는 할머니와 같이 놀이기구도 타고 정글짐도 올라가고 해가 질 때까지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 변했다. 아주머니가 됐다가, 언니가 됐다가, 자기만 한 친구로 어려지는 게 아닌가. 급기야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동생이 되어버렸다. 다래는 잠이 든 할머니를 등에 업었는데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눕혀놓았을 때는 할머니가 그새 더 작아져 있었다. 다래는 자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그 곁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잠이 깬 다래에게 엄마가 물었다. "냉장고에 홍시가 없어졌는데 네가 먹었니?"


꿈이 아니었던 걸까? 다래는 할머니 방으로 달려가 할머니 얼굴에 대고 속삭였다.


"명애야... "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우리 꼭 다시 놀러 가자."


문득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가 떠오르면서, 우리의 시간은 모두 다르게 흐른다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금 생각했다. 작가는 다래에게 할머니를 "명애야." 하고 부르게 한다. 우리 앞에 있는 누군가가 명애이고, 다래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잊고 사는가. 누구의 엄마나 아빠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니라, 자기만의 이름이 있는 고유한 사람이고, 또 한때 모두 싱그럽고 생기 넘치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아이가 할머니를 이해한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정말로 판타지를 원했던 게 아닐까? 다래한테 정말로 명애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할머니의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어리고 순수한 두 아이가 만날 수 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에서.



<위를 봐요>는 시선이 참신하고 대담한 그림책이다. 이야기의 서두는 거의 폭탄급이다.


가족 여행 중이었어.

수지는 차에 타고 있었을 뿐이야.

사고가 났지.

자동차는 바퀴를 잃었고, 수지는 다리를 잃었어.


수지는 아파트에서 나가지 못하고 위에서 길을 내려다보고만 있다. 사람들의 검은 머리만 보이고 수지는 '그냥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다. 수지는 간절하다.


"내가 여기에 있어요. 아무라도 좋으니... 위를 봐요!"


그런데 놀랍게도 한 아이가 위를 올려다본다.  아이는 묻는다.


 "너 뭐하니?"



물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수지는 대답할 수 있었다. "내려다보고 있어." 하고. 그러자 그 아이는 또 물었다.


"왜?"


이렇게 관계는 시작된다. 물어보는 것으로.  그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즐겁게, 행복하게 상상해보자. 현실은 이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말은 꿀꺽 삼키고 대신 이렇게 말해보자. 현실도 이럴 수 있다고.


세 그림책은 서점 서가를 꽉 채운 그 어떤 처세론보다도, 어려운 말들로 현란한 그 어떤 철학서보다도 더 선명하게 관계 맺음의 바른 길을 보여준다. 일하다가 열을 식히는 순이를 유심히 쳐다보는 분이의 모습으로, "명애야." 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다래의 모습으로, "너 뭐하니?" 하고 위를 올려다보며 물어봐주는 친구의 모습으로.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해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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