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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Feb 16. 2021

초롱초롱한 그림책

<고라니 텃밭> 김병하 글/그림

<고라니 텃밭>을 인터넷서점에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동네를 산책하다가 참 예쁜 모습을 보게 됐다. 엄마하고 아들이 숨바꼭질을 했던 모양이다. 몰래 숨었다가 짠 나타나면서 누군가를 놀래키고 있었는데, 바로 세 살쯤 된 아기였다! 오빠는 다정하게 동생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고, 엄마는 "놀랬지?" 하고 또 웃었다. 정작 아기는 볼만 발그레,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눈이 초롱초롱했다.


그림책은 어른도 보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순진하고 예쁜 아기들에게 보여주려고 만드는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이 딱 그런 그림책이구나, 싶었다. 아기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처럼 <고라니 텃밭>도 여러모로 참 초롱초롱하다!




우선 색이 정말 선명하다. 파랑, 노랑, 초록, 빨강의 대비에 정신이 반짝 깨는 것 같다. 형체마다 그림 선도 깔끔하게 둘렀다. 본문 그림들도 보여주려는 것만 그리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해서 독자의 시선을 그림 속에 딱 붙잡아둔다.  


내용은 무척 단출하다. 단출한데 싱겁지 않다. 첫 장을 열면 화가 김 씨 아저씨가 숲 속에 작업실을 마련하였습니다. 채소 기르는 게 좋아서 텃밭을 만들었습니다.라는 간단한 설명이 나오고 김 씨 아저씨가 흙을 고르는 모습이 묘사된다. 퇴비 포대가 여러 장 바닥에 깔려있고 돌로 밭 가장자리를 두를 계획인지 한 귀퉁이에 돌무더기도 보인다. 글은 텃밭을 만들었다는 얘기만 하지만 밭을 만드는 데는 무척 공이 많이 든다는 걸 그림 속에서 읽어낼 수 있다.


우리는 아저씨의 가족들을 안다. 책에서는 아저씨와 고라니 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아저씨가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생각하기 때문이다. 옥수수랑 감자는 첫째랑 둘째 딸을 생각하면서 심고, 쏙갓 등등은 아내를 생각하면서 심는다. 텃밭은 날마다 물 주고 잡초 뽑고 정성껏 보살폈더니 아주 풍성한 텃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첫 여섯 쪽만에 (그림책을 한 장, 두 장, 세 장 넘기는 사이에) 아저씨의 텃밭은 완성되었다. 이제 스물두 쪽에 걸쳐서 사건이 펼쳐진다. 대체 어떤 사건이길래 그렇게 얘기할 게 많을까?


사실 사건은 별 게 없다. 고라니가 쑥갓이랑 상추를 몽땅 먹어치우는 바람에 아저씨쑥갓이랑 상추 모종을 다시 심었고, 그랬더니 고라니는 쑥갓이며 상추를 먹는 것도 모자라 아욱이랑 치커리까지 몽땅 먹어치웠다. 그래서 아저씨는 허수아비를 세웠고, 고라니는 또 와서 먹었고, 이번에는 아저씨가 밤새 망을 봤고, 마침내 고라니를 발견해서 잡으려고 쫓아갔는데 놓쳤다는 얘기다.



김 씨 아저씨는 단단히 화가 났다. 가만두지 않겠어! 아저씨도 참... 고라니를 잡으려고 작정을 하고 밤새 망을 보는데 손에는 고작 새총을 들었다. 어쨌건 간에 아저씨는 고라니를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고라니가 텃밭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 네 이노-옴! 딱 걸렸어. 그런데 다음 장을 넘기니 아저씨가 어-! 하고 놀란 표정이다.


아저씨는 뭘 봤을까? 아내와 딸 둘을 주려고 정성껏 심은 옥수수며 감자며 상추며 쑥갓을 자꾸 훔쳐먹는 못된 고라니를 새총으로 한 방 쏴주려고 했는데, 아저씨는 도대체 뭘 본 걸까? 얘기하고 싶지만 이걸 말해버리면 읽는 재미를 뺏어버리는 꼴이 되니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고라니며 멧돼지가 농사짓는 분들한테는 꽤 골칫거리라는 얘기를 종종 듣기는 하는데, 야생동물들 편을 들자니 고된 농사일을 무시하는 것 같고 사람 편을 들자니 야생동물들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 같은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회색지대에 서 있다면, 권정민 작가는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에서 멧돼지 편을 들어 인간들에게 냉소를 보내는데, 이 책 <고라니 텃밭>의 김병하 작가는 고라니에게 훨씬 화해적이고 적극적인 손짓을 한다. 아주 따습다! 충분히 실천 가능한 해법 같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따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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