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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Mar 09. 2021

눈보라가 그치면

<안녕, 가부> 키무라 유이치 글 / 아베 히로시 그림


눈이 내립니다. 온통 하얀 눈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싶을 때면 이런 눈발을 상상하고 또 기다리곤 했습니다.

눈이 이 세상을 다 덮어버렸으면 할 때,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말이지요.




눈 속을 걸어가는 두 형체가 보입니다. 저 멀리 높은 산이 보입니다. 절대 넘지 못할 것 같은 뾰족한 산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저 둘은 몸을 붙이고 걸어가고 있는 걸까요?


늑대와 염소입니다. 둘은 친구입니다. 늑대는 염소를 잡아먹는 동물인데, 이 둘은 우연히 친구가 됐습니다. 늑대의 이름은 가부, 염소 이름은 메이입니다. 둘은 지금 도망치고 있습니다. 늑대들이 이 둘을 쫒고 있습니다.


늑대들은 가부가 자기네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잡아먹어야 할 염소를 친구로 삼아서였죠. 그래서 가부를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갈가리 찢어 죽이고 메이를 축하용 먹이로 쓰겠다며 둘을 찾고 있습니다.


가부와 메이는 쫓기는 신세이지만 함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함께 걸었습니다. 산자락은 아직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늑대들이 이들 뒤를 바짝 쫓고 있습니다.


가부와 메이는 이제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쪽 숲을 떠나 산 너머 다른 숲으로 가려고 합니다. 산꼭대기에는 구름이 걸려있습니다. 그 구름 속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 다짐합니다.


힘내서 산을 넘자. 알았지, 메이? 저 너머에 꼭 있을 거야, 푸른 숲이.
그럼 있고말고.

정말 구름 속에는 눈보라가 칩니다. 눈바람은 둘의 몸을 휘갈기며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불고 있습니다. 사방이 온통 눈입니다. 추위에 메이의 몸은 얼어붙고 결국 메이는 쓰러집니다. 가부는 눈구덩이를 파고 메이를 눕인 뒤 자기 몸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메이는 가부를 올려다보며 다정하게 웃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자기를 먹고 너는 살라고 말이지요.


목숨은... 끝이 있잖아. 하지만 우리 우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가부가 어떻게 메이를 먹을 수 있겠어요? 가부는 눈구덩이에서 나와 메이가 먹을 풀을 찾아 눈발을 헤치며 돌아다니다가 늑대들이 산을 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가부는 자신의 목숨을 줄 수도 있다고 했던 메이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가부는 늑대들을 향해 내달리며 몸을 던졌습니다. 가부의 몸은 눈덩이가 되어 거대한 눈사태를 일으켰고 늑대들과 함께 모든 것을 집어삼켰습니다.


어느덧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그치고 아침 햇살이 쏟아졌습니다. 정신을 차린 메이의 눈 앞에 저 멀리 푸른 숲이 보입니다. 가부와 메이는 눈보라 속에서 저도 모르게 산을 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부가 옆에 없습니다. 높은 산속에서 메이는 가부를 소리쳐 부릅니다.


메이는 그칠 줄을 모르고 언제까지나 가부를 불렀습니다.



<안녕, 가부>의 '안녕'은 그러니까 작별의 안녕입니다. 어린이용 이야기인데 슬프게 끝나는 드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목숨을 내어주어도 좋을 친구.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을까를 묻기 전에, 과연 나는 이런 친구가 될 수 있을까를 묻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 한 장', 안도현.)  <안녕, 가부>를 읽으며 뜨거운 눈물이나마 흘릴 수 있는 어른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늑대와 염소가 어울려 친구가 되는 이상적인 세상은 성경 구절을 연상시킵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사야 11장)


작가 키무라 유이치가 어떻게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 성경 구절처럼 모두가 형제요 이웃이 되는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며 가부와 메이의 이야기를 위에서 아래로 지어내려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먹이 사슬 관계인 늑대와 염소가 친구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에서부터 시작해 이야기를 위로 지어올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후자 같습니다. 이야기는 아무튼 비극으로 끝나니까요. 우리 사회는 규범에서 벗어난 것들을 처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온갖 비극적인 일들은 그로 인해서 벌어집니다.


늑대가 과연 먹잇감과 친구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작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관해서 의문을 가져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물음은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습니다.


흑인과 백인은 친구가 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요?

남자와 남자는, 여자와 여자는 연인이 되면 안 되는 걸까요?

하느님은 항상 옳을까요?

학교는 꼭 가야 하나요?

사람은 꼭 사교적이어야 하나요?

책을 꼭 읽어야 하나요?

말은 꼭 조리 있게 해야 하나요?

사람은 꼭 똑똑하고 잘나야 하나요?

...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수많은 규범을 지키려고 애쓰며 살았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잘려나간 소중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내 본연의 모습, 자연스러운 마음 같은 것들. 세상은 과거보다 더 유연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편협하고 냉혹합니다. 가부와 메이를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든 삼엄한 늑대들의 법이 이 사회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속에서 무자비하게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늑대의 법에 대해서 가끔은 되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게 꼭 그래야만 하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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