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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Mar 10. 2021

화가의 시선이 닿은 자리

<고구마구마>와<걷다 보면>

이름도 재미있는 <고구마구마>는 사이다라는 필명의 작가가 그리고 쓴 그림책이고, 강산애의 노랫말이 연상되는 제목 <걷다 보면>은 이윤희 작가가 그리고 쓴 그림책입니다. 두 작품은 그림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사이다 작가의 그림체는 투박합니다. 중요한 특징만 잡고 나머지는 다 생략했습니다. 표지  속의 고구마들은 마치 머그샷(범죄 혐의자의 정면 측면 모습을 찍은 사진)을 찍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선 공책의 종이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이런 연상을 노린 것이겠지요? 머그샷도 피사체의 키를 보여주기 위해서 배경에 줄자가 있으니까요.




세 번째 고구마는 상당히 험악합니다. 몸에 칼자국이 있네요... 하지만 표정들이 좋습니다. 겉표지를 펼치면 푸릇하고 보라색이 간간히 섞인 고구마 잎사귀들이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다시 한 장을 넘기면 제목이 적힌 속표지가 다시 나오고, 다시 한 장을 넘기면 바야흐로 고구마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다채롭다고 했지만 사실 별건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겼고, 쪄먹고 구워 먹고, (팍 터뜨리는 한 방이 있는데 그건 직접 확인해보시기를) 남은 한 알로 싹을 틔우며 이야기는 끝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는 방법이 굉장히 창의적입니다.


영화 <끝까지 간다>를 보신 분이라면 동의하실 것 같은데, 단순하고 뻔한 줄거리를 시종일관 가슴 졸이며 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각본과 편집의 예술입니다. <고구마구마> 역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32쪽에 걸쳐서 흥미진진하게 펼쳐놓습니다. 이 작품을 보며 '이거, 예술이네, '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더랬습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유쾌하고 개성 있는 그림에 말장난을 입혀놓았습니다. 우리나라 그림책에서, 아니 우리나라의 문학에서 말장난을 즐기는 작품은 참 드뭅니다.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말장난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책이 더 특별해 보입니다.


<고구마구마>의 깔깔거리는 투박함 대척점에 <걷다 보면>이 있습니다. 이윤희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눈이 환하게 열리는 것 같았다고 말하면 지나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림은 거의 세밀화입니다. 모두 흑백으로 처리됐습니다. 비가 그친 뒤입니다. 햇빛이 밝게 비치고 젖은 땅이 마르는 중입니다. 하지만 보도블록이며 횡단보도, 아스팔트 도로 등에는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습니다. 작가는 바로 이 시점에, 바로 이 촉촉한 바닥을 잡아냈습니다.


빗물 자국은 사슴이 되고, 환한 햇빛을 받아 생긴 고양이 그림자는 다정합니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도로공사용 고깔을 잡고 놀기도 하고, 거인이 호스로 꽃에 물을 주기도 하는군요. 아기 오리와 엄마 오리도 총총총 걸어갑니다.


작가의 시선은 앞만 보고 바쁘게 걸어가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향합니다. 하수도 뚜껑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은 유심히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대개는 못 보기 마련이지요. 보도블록의 다양한 모습들이 만들어내는 리듬감도, 블록 틈에서 자라는 풀들의 소박하고 섬세한 아름다움도 말입니다. 이윤희 작가는 공기 중의 물기까지 그림에 담아놓은 것 같습니다. 상쾌하고 촉촉한 비 갠 뒤의 냄새까지도.


이 두 작가는 극도로 다릅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개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시선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구마가 모양이 제각기라는 건 알지만, 맛있게 생긴 통통한 걸 고르려고나 하지 빈약한 고구마가 가진 사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작가는 잘 생긴 고구마만 편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가 오고 나면 물웅덩이를 피해 가려고나 바닥을 내려다보지, 물웅덩이의 모양이며 그 주변 사물들이 엮어내는 풍경을 관찰할 마음의 여유는 없습니다. 작가는 천천히 걸었을 것입니다. 아주 천천히 말이지요. 그 하나하나를 살피려면 그래야 하지요.



<고구마구마>와 <걷다 보면>은 화가의 시선이 깊숙히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화가가 바라보는 것들을 나도 같이 보게 됩니다. 화가 덕분에 나도 그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화가의 시선 자체도 보입니다. 주변을 가만히 바라보는 화가의 눈이 그림 위로 겹쳐지는 듯한 느낌은 아마도 나의 착각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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