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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Mar 15. 2021

그림책과 삽화




이 멋진 그림은 19세기의 천재적인 화가 구스타프 도레의 작품입니다. 중앙에 말을 탄 기사가 보입니다. 말과 기사가 무언가에 맞고 뒤로 튕겨서 날아가는 것 같지요. 쪽 상단에 누더기처럼 보이는 네모난 형체는 뒤 배경을 자세히 보면 짐작이 됩니다. 풍차의 날개입니다. 그리고 평지에 사람 하나와 동물 하나가 자그마하게 보입니다. 이제 이쯤 되면 이 광경이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바로 <돈키호테>입니다. 구스타프 도레는 <돈키호테>의 삽화를 그렸습니다. 국내의 두 출판사에서 출판된  완역본 <돈키호테>는 모두 도레의 삽화가 실린 저본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림책을 소개하는 매거진에서 삽화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에세이로 넣자니 그림 얘기고 그림책 매거진에 넣자니 삽화 얘기라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어쨌든 그림이 주요 관심사이니 이곳에 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책은 삽화가 딸린 책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제 (근거 없는) 추측입니다. 그러니 삽화가 실린 책과 그림책은 서로 친척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림책의 그림과 삽화는 분명히 역할이 다릅니다. 그림책은 글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글과 대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림책의 그림은 글을 일부 대신합니다. 하려는 말을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삽화는 좀 다릅니다. 삽화 없이도 작품은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니 삽화는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갑자기 그림 작가의 위상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죠. 하지만 저는 삽화 때문에 어떤 책을 선택할 때가 있고, 삽화 때문에 독서의 기억을 강렬하게 간직하기도 합니다. 삽화는 그 자체로 온전한 작품에 뭔가 특별한 분위기를 입힙니다. 요즘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데 작품이 워낙 재미있어서 그림이 없어도 온갖 회화적 상상을 하게 되지만, 도레의 삽화를 보는 순간 장면 장면이 갖는 감정들이 흑백에서 컬러로 드라마틱하게 전환되는 것 같습니다. 미지근한 인상이 돌연 뜨거워진다고 할까요. 온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그렇습니다. 물론 도레 같은 작가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돈키호테에게서 느껴지는 모든 감정들이 응축돼 있는 것 같습니다. 용맹하고 비장하며 슬프고 희극적입니다. 지고한 이상에 취한 한 인간의 모습을 참으로 잘 담아냈습니다. 뒤로 구름의 형상들은 돈키호테의 망상이 거룩한 이상이자 헛된 환상임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가 똑바로 들고 있는 창, 그리고 말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긴 세로축은 그가 매우 이상적인 인간임을 강조합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희비극이 바로 <돈키호테>입니다.


저의 인생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작품도 삽화가 있습니다. 바로 도서출판 논장에서 나온 <시튼 동물기> 5권 시리즈입니다. 2003년 발행된 책으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은 동물기를 쓴 동물학자이자 소설가, 박물학자인 동시에 화가(!)입니다. 동물기에 실린 삽화는 모두 그가 직접 그린 것들입니다.



시튼이 이야기하는 용맹하고 영리한 까마귀 실버스팟, 가슴 아픈 늑대왕 로보, 산토끼의 영웅 리틀워호스 같은 동물들은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고 해도 말이지요. 죽음은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완료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튼이 그린 그들의 모습으로 들을 기억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앨범에 간직하고 있듯이 실버스팟과 로보와 리틀워호스의 모습을 삽화로 간직하는 것이죠. 이것이 삽화의 힘입니다.


혹시 계몽사 문학전집을 아시나요? 아주 오래전 책입니다. 책등이 벽돌색으로 된 50권짜리 전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30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집의 모든 책들을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더랬는데, 밥을 먹으면서도 읽어서 책장 여기저기에 국물 반찬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책들 중에서 특별히 아꼈던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중 한 권이 바로 에리히 캐스트너의 <에밀과 탐정들>입니다.



화가 이름은 발터 트리어입니다. 시골아이 에밀이 외할머니 댁으로 가려고 혼자 베를린행 기차를 타면서 시작되는 이 모험담은 수상한 중절모의 남자를 쫓는 이야기입니다. 낯선 도시에서 모르는 아이들이 에밀을 도와줍니다. 딱 제 나이로 보이는 에밀에게 얼마나 감정 이입을 했는지, 아직도 그때의 짜릿함이 이 삽화만 보면 되살아납니다. 이야기는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캐스트너의 글만으로도 완벽합니다... 만... 동글동글한 먹선으로 그려낸 에밀의 모습과 긴장된 표정, 정의감에 불타는 친구들의 모습은 캐스트너의 글을 춤추게 합니다. 삽화가 글을 더 완벽하게 (더 완벽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모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순전히 제 기준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마지막으로, 글과 그림이 다 되는 또 한 명의 작가가 있습니다.



아놀드 로벨입니다. 정다운 친구 개구리와 두꺼비의 이야기를 쓴 아놀드 로벨은 이들에게 특별히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네요. 그냥 이렇게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두꺼비가 아침에 일어나 말했어요. "아이쿠! 집 안이 엉망진창이다. 할 일이 태산 같구나."

개구리가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말했어요. "두껍아, 네 말이 맞아. 정말 엉망진창이다."


이름이 없어서 좀 서글플까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서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구리와 두꺼비는 딱 그 개구리이고 딱 그 두꺼비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 개구리와 그 두꺼비가 여느 수많은 개구리와 두꺼비 중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왜냐하면 로벨이 그들은 저렇게 그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는 두꺼비보다 조금 키가 크네요. 두꺼비는 몸이 노랗습니다.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서로 눈을 맞추기도 합니다. 로벨의 이야기 역시 그 자체로 충족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삽화가 있어서 더 포근하게 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올빼미가 울고 있어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립니다. 주전자를 받치고 있고요. 무슨 슬픈 일이 있어서 저리 울까요? 로벨의 <집에 있는 올빼미>에 실린 삽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궁금하시면 한번 찾아 읽어보세요. 기분이 아주 유쾌해지실 거예요.


그럼 여러분 모두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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