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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Mar 29. 2021

우직하고 바르게!

<두꺼비가 간다> 박종채 글 / 그림

바야흐로 봄입니다. 지난 3월 5일은 개구리와 두꺼비가 깨어난다는 경칩이었어요. 경칩이라고 무조건 안전하지는 않은 모양이라, 얼마 전 개천에서 죽은 개구리를 봤습니다. 때 맞춰 깨어났지만 기온이 너무 낮아 얼어 죽은 것이지요. 야생에서 개구리를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두꺼비는 더 보기 어렵죠.


두꺼비를 소재로 한 그림책도 좀처럼 없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두꺼비 그림책을 두 권이나 찾았어요. 그중 한 권이 아주 근사합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좀 징그러운가요?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지 몰라요. 어른이 징그럽다고 하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호의적으로 두꺼비를 바라보지 않을까요? 아무 선입견 없이요.


그림책은 치밀한 계산 하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림책 표지를 넘기고 본문을 거쳐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마치 카메라 줌을 당겼다 밀었다 하는 것처럼 우리의 시점을 유도합니다. 그리고 그림들이 마치 음표처럼 어울려 운율을 형성하고 빠르고 느린 박자를 만들어냅니다.  


우선 표지의 동그란 무늬들을 보세요. 두꺼비 알입니다. 따라서 제목 '두꺼비가 간다'는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인지 알 수 있지요. 표지를 넘기면 속표지가 바로 나오지 않습니다. 한 장, 두 장, 세 장째 나와요. 큰 풍경, 작은 풍경, 작은 풍경으로 시선이 당겨지면서 마지막 세 번째 풍경 위에 <두꺼비가 간다>는 표제가 찍혀서 속표지가 됩니다. 마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 같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가까이, 겸손한 각도로 이끌면서 말이지요. 귀한 것을 보려면 우리의 자세는 낮아져야 한다는 뜻일까요?


속표지를 넘기면 우리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아주 의젓합니다. 둥. 그림책은 음향 효과가 없지만 글자로 청각적 효과를 최대한 살릴 수 있습니다. 왼쪽 장에는 점잖은 두꺼비를, 오른쪽 장에는 '둥'이라는 글씨 하나를 궁서체로 나타냄으로써 두꺼비의 첫인상을 잘 표현했습니다.




본문을 차례로 넘기면 두꺼비가 한 마리, 두 마리, 점점 늘어나면서 무리를 이룹니다. 소리도 둥 , 두두둥, 둥둥 덩덩, 두둥 두둥 덩덩덩, 빨라집니다. 두꺼비들은 숲에서 나와 도로를 건너고 철망을 기어오르고 (하수도 관으로 보이는) 관을 통과해 마침내 넓은 물에 이르렀네요. 강 같기도 하고 저수지 같기도 합니다. 물빛이 푸른 것을 보니 아직 새벽인가 봐요.  


이곳에서 두꺼비들은 짝짓기를 합니다. 난리도 아닙니다. 생명의 향연입니다. 이윽고 모두 산란을 끝냈네요. 지금까지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두꺼비 알들은 마치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이제 알들은 제각기 분열해서 마침내 작은 두꺼비로 성장할 것입니다.  


시선은 멀어져 다시 강 풍경이 나옵니다. 이제 물빛이 노르스름하게 변했습니다. 저는 그 빛에서 벼가 노랗게 익은 가을 논을 떠올렸습니다.



작가는 생명의 가치와 그 고귀한 연속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이 끝나고 책 마지막 장에는 박종채 작가가 쓴 시 <두꺼비가 간다>가 실려있고 맞은편 쪽에 헌사가 있습니다:


2014년 7월 16일 오후 3시.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 42명이 국회에 도착했다. 이 아이들은 7월 15일 오후 5시, 수업을 마치고 안산 단원고등학교를 출발해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47Km를 총 22시간 동안 걸어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그 길 한가운데 서기로 했다.

이 책을 세월호 유가족들과 세월호를 기억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두꺼비와 관련된 설화 '지네 장터'를 아시나요? 한국 설화에 두꺼비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잊히면 너무 아까운 이야기일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해봅니다:


충북 청주 지네 장터에는 그 옛날 지네를 위한 당집이 있었다. 옛날 이 지네 장터에서 몇 십리 밖 어느 마을에 장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순이라는 효녀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지성으로 모셨으나 남고 같이 편안하게 못 해 드려 안타까워했다.

어느 날 웬 두꺼비 한 마리가 수채에서 나오므로 순이가 밥찌꺼기 등을 주었더니 아침저녁으로 꼭 두꺼비가 나와 순이는 그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몇 해 지나자 두꺼비는 큰 강아지만큼이나 컸다.

그런데 그 무렵 장터 마을에는 큰 지네가 나타나 인명의 피해가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의논하기를 그 지네를 위하여 당집을 짓고 해마다 처녀 한 사람씩 제물로 바치기로 하고 그 방법은 마을에서 돈을 거두어 다른 마을에 가서 처녀를 사 오기로 하였다.

마침 순이가 살던 동리에도 그 소문이 돌아 순이는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생각한 끝에 자기 몸을 팔아 불쌍한 아버지를 편안하게 해 드리려고 결심한다. 처녀를 사러 온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의 뜻을 전하자 사람들이 동정하여 돈을 많이 주었다. 순이는 그 돈으로 아버지에게 맛있는 음식을 드리며 잘 봉양하다가 약속한 날 뒷일을 장자 집 어른에게 부탁하고 아버지에게 몰래 유서를 써서 돈과 함께 드리고 부엌 뒤 수채 구멍에서 나와있는 두꺼비에게 마지막 먹이를 주며 슬프게 작별을 한다.

순이는 가마에 실려 제전까지 와서 제관들에 의하여 흰 베로 손발이 묶인 채 컴컴한 당집 안 마룻바닥에 놓였다. 제관들은 제를 지낸 뒤 당집의 문을 걸고 나가버렸다.

밤이 깊어지자 무엇이 발목으로 기어 오는 것이 있어 깜짝 놀라 보니 두꺼비다. 첫닭이 울자 제전의 불이 꺼지며 찬바람이 일더니 천장 처마에서 무슨 불덩어리 같은 빛이 자기 앞으로 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자기 발목에서 푸른 불줄기가 그리로 올라갔다.

붉은 불덩이 빛과 푸른 불줄기가 서로 맹렬히 여러 시간을 두고 싸우더니 붉은 불덩어리 빛이 쫓기어 꺼지려 하다가 처마 안에서 큰소리가 나면서 천장에서 무겁고 크나큰 것이 마룻바닥 위에 떨어졌다.

날이 밝자 제관들이 관을 메고 시체를 찾으러 왔는데 죽은 줄 알았던 처녀는 살아있고 당집 마루에는 크나큰 지네가 죽어 자빠져 있고 안 구석에는 두꺼비 한 마리가 입에서 푸른 독기를 뿜고 있었다.

처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그 뒤부터 그 마을에는 지네의 피해가 없었다.


민담이나 설화는 매우 상징적이지요. 순이는 외로운 아이입니다. 그리고 두꺼비는 여성들의 영역인 부엌에 나타나요. 찌꺼기를 버리는 수채 구멍에서 말이지요.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요?


쓰레기, 즉 우리의 쓸데없는 생각들 혹은 초라하고 추한 존재들 속에 어쩌면 무척 소중한 무엇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는 뜻일까요? 두꺼비는 우리를 구해주니까요. 어린 순이는 깨끗한 동정심으로 못생긴 두꺼비 돌봐줍니다. 징그럽다고 쫓아버리지 않아요. 순이의 그런 순수함이 우리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여기에 소개한 '지네 설화'는 <한국 민담의 심층 분석>(이부영, 집문당)에서 인용했습니다. 저자는 융의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지네 설화를 설명하는데 무척 흥미로워요. 한자가 섞여서 읽기가 불편하지만 생각해볼거리가 참 많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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