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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Apr 20. 2021

이야기를 싣고 달리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김효은 글 / 그림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문득 바퀴가 헛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 않나요? 매일 그렇다고요?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다고요? 아님, 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냐고요? 사람마다 시기마다 모두들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어떤 이들은 열심히 살 필요 없다는 얘기도 합니다. 길가에 핀 들꽃처럼 살라고요. 그게 답인 것도 같습니다.


어쨌든 가끔은 인생이 순환노선을 무한 반복하는 2호선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하철역에 서서 맞은편 플랫폼에 선 사람들을 볼 때면 받는 특별한 인상이 있어요. 황량하다, 무의미하다, 외롭다, 같은 말들로 버무린 그런 인상입니다. 하지만 그건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주는 느낌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딱딱한 시멘트와 철골의 공간, 삶의 어둠을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검은 굴, 그리고 낯선 사람들... 그런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 존재는 잠재적인 적입니다.  


김효은 작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림책 표지, 맞은편 플랫폼에 선 사람들이 무채색으로 그려져 있는 걸 보면. 건너편 플랫폼에 선 사람들은 모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낯선 것, 낯선 존재에 대해 본능적으로 우리를 보호하려 합니다. 그래서 방벽을 칩니다. 맞은편 플랫폼의 사람들도 우리를 건너다보며 똑같은 심정을 느낄 겁니다. 지하철 플랫폼이라는 거대하고 서늘한 공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작가는 괜히 작가가 아닙니다. 작가는 상상의 눈으로 우리들의 삶을 투시합니다. 상상의 귀로 우리들의 속마음을 듣습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 거대한 회색 공간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합정-시청-성수-구의-강남-신림-신도림,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달리는 지하철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합정에서는 예쁜 딸의 아빠이신 완주 씨가 달려오고, 시청역에서는 제주도에서 올라오신 해녀 할머니께서 '똘 (딸) 좋아하는 문어영(문어랑) 똘의 똘(딸의 딸) 좋아하는 전복'을 들고 지하철을 타십니다. 성수역에서는 '엄마 딸' 유선이가 두 아이를 안고 지하철에 오릅니다. 구의역에서는 구두 수선을 하시는 재성 아저씨가, 강남역에서는 종일 학원에서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나윤이가 탑니다. 오랜만에 본 나윤이가 반가워서 지하철은 몸을 흔들어보지만 나윤이는 어깨가 축 처져서 고개를 들지 않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바쁘신 길이지만 잠시만 귀 기울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거 하나면 아빠랑 아들 사이좋게 나눠 낄 수 있어, 엄마 손 따땃-하게 해 줘, 예쁜 딸 넘어져도 손 다칠 일은 없거든! 빨주노초파남보, 빠지는 색 하나 없이 다 고와. 자-한 족에 천 원, 천 원에 모니다!


뭐든지 다 파는 구공철 아저씨입니다. 승객들 무릎 위에 색색깔 장갑들이 하나씩 놓여있네요. 해녀 할머니께서는 초록색 장갑을 껴보십니다. 이제 신림역입니다. 모두가 양복을 입고 바쁘게 일터로 가는데 스물아홉 살 도영이는 남방을 입고 혼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질그릇 도에 옥구슬 영, 겉모습은 투박해도 마음속에 항상 밝고 빛나는 것을 담은 사람이 되라고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을 마음에 달고서요.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이방인이지만, 해녀 할머니는 유선이의 예쁜 두 아가에게 손녀딸에게 주려고 사온 막대사탕을 꺼내 주고, 재성 아저씨의 바지 주머니에는 구공철 아저씨의 빨간 장갑이 살짝 코를 내밀고 있습니다. 유선이의 아가가 깜박 잠이 들었네요. 도영이의 팔에 기대어.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반만 진실입니다. 진실의 나머지 반쪽은 다른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라고요.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잠자고 똑같이 아파하고 사랑하며 사는 비슷한 사람이라고요. 평범해서 너무나 귀한 사람이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동류입니다.  




https://youtu.be/09zLJAOc6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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