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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Oct 19. 2020

순이와 돌이, 과거로 가는 시간의 길

<우리 순이 어디 가니>, <심심해서 그랬어>, 윤구병 / 이태수


여름, 농촌이다. 배추밭과 파밭이 부지런한 밭주인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밭주인은 우렁각시처럼 아무도 몰래 다녀갔나 보다. 저 넓은 풍경 속에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없다. 농부가 일치감치 일어나 일을 끝낼 즈음, 도시인들은 그제야 하루를 시작한다. 두 세계의 거주인들은 교차하기 힘들다. 


보리출판사에서 펴낸 계절 그림책에서 보여주는 농촌은 이제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거의 사라진 풍경이 되어버렸다. 서울을 벗어나면 여전히 논과 밭이 있지만 서울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지금, 그림책의 농촌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생한 현실이 되기도 한다. 비록 그것이 심리적 현실이라고 해도. 


계절 그림책의 네 권 가운데 봄 편과 여름 편에는 돌이와 순이가 나온다. 봄 편에는 어린 순이가 밭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새참을 가져간다. 아스라한 봄의 풍경을 이태수 작가가 참 잘 표현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 편에서는 어린 돌이가 너무 심심해서 닭이며 염소, 돼지, 소 등을 풀어주면서 벌어지는 난감한 상황을 그렸다. 어린 시절, 적막한 시간에 혼자 빈집을 지켜본 사람이면 돌이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그림 속 돌이는 쑥스럽게 뒤통수를 만지고 있다. 개구쟁이 같지만 내 눈에는 아이가 고독해 보인다. 



어쨌든 이런 농촌이 비슷하게나마 존재할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세상에 두건을 쓰고 새참을 이고 가는 엄마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엄마 소와 송아지가 다정하게 몸을 비비는 외양간도 진작에 사라졌고, 헐렁한 러닝셔츠에 고무신을 신은 채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꼬마도 있으려나? 이들은 모두 과거의 존재. 전국을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을 뒤져야 나오는 장소와 존재다. 그래서 이 그림책을 요즘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시절을 엇비슷하게라도 경험해본 나는 이 그림책들을 통해서 내 어린 한때를 만난다. 그림책을 문지방처럼 넘어서 다른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흔이 넘은 엄마에게도 이 그림책들을 보시라고 드렸다. 지금 엄마는 그림책과 무척 비슷할 엄마의 옛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다. 엄마는 치매 환자다  


치매라고 하면 흔히들,  진단을 받는 즉시 인격 상실자가 되는 줄 안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며 내면에 갇혀버린 혹은 내면이 완전히 비어버린 사람 말이다. 치매는 두렵고 끔찍한 질병이며, 절대 걸리고 싶지 않은 질병이라고 인식되고, 내 가족이 치매에 걸리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한다. 그런데 꼭 그래야 할까? 


시어머님이 치매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이미 한번 봤고 친정엄마마저 치매 진단을 받으면서 내 생각은 좀 달라졌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이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치매 환자의 세상을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다... 


시어머님은 치매 중기로 접어들 무렵 갑자기 폭력적이 되셨다. 난데없이 의부증이 생기면서, 그렇게도 조신하시던 분이 슬리퍼를 벗어 시아버님을 때리셨다. 어머님의 증상은 약물로 즉시 사라졌고, 그것을 보며 나는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약물로 조절되고 조정되는 너무나 사소한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단일하고 고유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어머님은 아버님과 살던 긴 세월의 어느 한 시점을 다시 한번 사셨던 것은 아닐까 하고. 사십 대 젊은 어머님이 팔십 대 늙은 어머님의 내면에서 되살아나 원기 왕성하고 자유롭던 젊은 남편을 향해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행동을 실행했던 것은 아닐까. 애정과 원망을 한껏 실어서. 젊은 그녀는 약물로 금세 통제되었지만 한 순간만큼은 '살아' 있었다. 


친정엄마가 치매 진단을 받은 지 이제 팔구 년째로 접어든다. 엄마는 당신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큰아들 칭찬, 요양원의 밥이 참 맛있다는 얘기, 그밖에 두어 가지 화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신다. 그래도 아직 딸을 기억해주시고 손자들도 반가워하신다. 아직 나와의 끈을 놓지 않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이제 반쯤 등을 돌리셨다. 당신의 옛날을 향해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치매는 현재로부터 돌아서서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현재의 일을 차츰 잊어가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몰라보고, 가스불을 끄는 법도 변기 물을 내리는 법도 잊어버리지만, 산다는 행위가 꼭 현재에서만 펼쳐지라는 법은 없다. 소위 치매환자들도 여전히 '산다'. 다만 현재와의 접점을 잃었을 뿐, 그들도 여전히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그 길은 아스라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과거로 이어진 길. 


누군가는 옛날 젊었을 적 신혼시절의 젊은 남편을 기억할 테고, 누군가는 뛰놀던 고향의 시골길을 기억할 테고, 또 누군가는 어렵던 힘들던 시절을 기억할 테다. 아니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그때를 '살'것이다, 그 순간들을. 비록 소통하는 법을 잊어서 그 삶들을, 그 감정들을, 그 고민과 고통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언어적으로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내면으로 생각과 추억이 흘러들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만 맴돌지라도. 하지만 가끔, 불현듯, 귀한 순간들은 찾아온다. 그때는 마치 SF영화에서 시간의 차원을 넘어가는 문이 열리는 것처럼 그들의 내면도 잠시 열려서 현재의 우리와 연결된다. 임종 직전까지도 그런 순간은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지간히 시달렸다. 나라면 절대 견디지 못할 그리고 견디지도 않을 시련을 겪으셨다. 얼마나 그 시달림이 지긋지긋했는지 엄마는 자식들에게 언제나 '너희' 집안이라고 말씀하셨지 '우리' 집안이라고 하질 않으셨다. 당연히 아버지 옆에 묻힐 생각은 추호도 없으셨다. 그러더니 치매가 진행되던 어느 날 문득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당신을 얼마나 아꼈는지 모른다고 자랑을 하시는 게 아닌가. 그리고 아버지 옆에 당신의 무덤을 만들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를 견디었던 그 긴긴 시련의 시간을 엄마가 잊은 건 참 다행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막 시작되던 짧은 신혼 시절을 새롭게 기억해낸 것은. 그때 젊은 아버지는 젊고 예쁜 엄마를 분명히 사랑했을 것이다... 


현재 엄마는 지금 이 자리의 나를 보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신다. 엄마가 돌아보는 그 풍경을 나는 알지 못한다. 조만간 현재와 영영 이별 하시겠구나, 생각한다.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하지만 엄마가 혼자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신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엄마는 누구의 엄마도 아닌 진짜 자기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엄마는 여전히 엄마의 삶을 살고 계시고, 그 삶은 길을 거꾸로 되밟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과거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 속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속으로. 마치 보리출판사의 계절 그림책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옛날 농촌을 그리듯. 


친정엄마는 건강하실 때, 당신이 얼마나 귀한 딸이었는지를 자랑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열 살이 넘어서까지 머슴 등에 업혀 다녔노라, 시집가기 전까지 궂은일은 전혀 안 했노라고. 그래서인지 엄마한테서 버릇없는 응석받이의 모습이 슬쩍슬쩍 보이면서 영리하고 잘난 척하는 계집애가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엄마가 이 그림책을 보며 그 아이를 만났으면 좋겠다. 어린 순이를 보면서 어린 당신을 더 확실하게, 더 구체적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업혀 다녀서 발에 흙을 묻힐 일도 없었다는, 귀하게 자란 그 계집애를 말이다. 그 아이가 되어 인생의 황금기를 다시 한번 누리셨으면 좋겠다. 


기억 속에서 더 찬란해졌을 과거의 시절 속으로 그와 그녀가 걸어 들어간다. 그들은 빛 속으로 점점 들어가 결국에는 빛으로 화한다. 누가 그들을 동정할 수 있을까. 우리의 동정은 값싼 오만일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치매를 앓는 그들도 우리처럼 여전히 삶을 산다, '어떤' 삶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이 각자 '어떤' 삶을 살듯이.  


엄마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껏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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