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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Oct 26. 2020

아이가 죽음을 만났을 때

<잘 가, 작은 새>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 크리스티안 로빈슨 그림

살아있다는 것은 무얼까? 숨을 쉬는 것? 몸이 따뜻한 것? 노래하고 달리는 것? 처음으로 죽음을 만났을 때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 될까? 아마도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례식을 치르지 않을까? 



<잘 가, 작은 새>의 부제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례식'이다. 아이들은 공원에서 죽은 새를 발견했다. 새는 아직 따뜻했지만 숨을 쉬지 않았고 몸이 조금씩 차가워지며 굳어갔다. 아이들은 새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설명 없이도 죽음을 안다는 것이 신기하다... 죽음은 우리가 갖고 태어나는 선험적 지식일까? 혹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데서 유추해내는 거의 본능적 인식인지도. 


아이들은 새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의 절차는 대단히 훌륭했다:


땅을 파고

햇살에 데워진 풀고사리 잎을 깔고

새를 포도나무 잎사귀로 싸서 그 위에 눕히고

풀고사리 잎으로 덮고

작은 흰 제비꽃과 노란 들꽃을 그 위에 올리고 노래를 부른다.

잘 자, 작은 새야, 깊이 잠든 작은 새야...

그런 다음 흙을 덮고

풀고사리 잎과 꽃들을 무덤 위에 풍성하게 올리고

작은 돌 비석을 세운다. "작은 새 여기 영원히 잠들다"라고 쓴.


애도는 새를 묻어주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죽은 이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무덤을 찾아와 죽은 새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날마다 풀과 꽃으로 무덤가를 꾸며주었다. 어느 날 그 새를 까맣게 잊을 때까지... 


저자는 죽음이란 이렇게 성심성의껏 다뤄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더럽고 무섭고 징그러운 것을 피하듯 죽음을 피할 것이 아니라 이렇듯 다정하고 경건하게 마주 보고 보내주어야 할 것임을. 아이들은 죽음을 아무런 설명이 없는데도 알았듯,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새의 죽음을 애도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한때 살아 숨쉬었을 새를 향한 존중은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나와 읽는 이와 보는 이의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다.  


요즘은 너나없이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처리(!) 해야 하는 것인 양 생각하지만 과거에는 모두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우리 아버지도 집에서 돌아가셨고, 친구 어머니도 집에서 돌아가셨다. 


어떤 죽음이든, 그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와는 무관하게, 귀하게 대해지기를 꿈꾼다. 산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어서 죽은 이가 치러냈을 고난과 역경에 마음이 경건해지면서 또 애틋하다.  


하지만 죽음은 잊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죽은 이들은 그들대로 안식을 취하고, 살아있는 이들은 그들대로 또 삶에 몰두해야 하니까. 어른들의 삶은 씁쓸함으로 버무려진 것일지 모르겠으나 이 그림책의 아이들처럼 어린 새싹들이라면, 비록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해도,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 때문에 죽음을 오래 품고 있기가 어렵다. 죽은 새는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이다. 


죽음을 까맣게 잊은 아이들이 참 사랑스럽다.    


p.s. 거의 마주칠 일이 없던 옆집 아주머니께서 일 년쯤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죽은 새가 간 곳으로 떠나신 것이다. 이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자책이 된다. 부디 새처럼 가볍게 날아가셨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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