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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Nov 02. 2020

가을, 나그네의 선물

<나그네의 선물> 크리스 반 알스버그 글/그림


가을이다. 

산이 울긋불긋하게 물들고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을비가 하루 종일 내렸지만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깔끔한 공기를 마시는 계절, 

길고 습한 여름과 대비되어 더 반가운 손님 같은 계절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판타지를 그리는 그림작가인데, 그의 판타지는 약간 기괴하다 싶은 데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가슴이 아릴 정도로 사랑스럽다. 처음 이 그림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반하고 말았다!




표지 사진에는 남자와 아이가 있다. 뒤로는 푸른 나무들이 보이고, 풍경 속에 나무와 풀과 두 사람에게 황금빛 햇살이 가득 내린 것을 보니 시간은 석양 무렵이다. 그리고 하늘에 기러기 떼가 날아간다... 철새에 시선이 닿는 순간, 우리는 계절이 바뀌는 때임을 눈치채게 된다.  


아이의 아빠, 베일리 씨는 숲 속 길을 자동차로 달리다가 어떤 남자를 친다. 그림 속의 저 남자다. 남자는 다친 데는 없었지만 기억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베일리 씨 집에서 묵게 되는데, 기억을 잃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나그네로 번역했지만 원서 제목은 The Stranger인데, 그는 베일리 씨 가족에게도 낯선 사람이었지만 기억을 잃었으니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사람인 셈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의사 선생님이 그의 체온을 재려고 하니 수은이 밑바닥에 달라붙어 버렸고 따뜻한 수프를 식히려고 그가 후, 하고 입김을 부니 방 안에 바람이 이는 게 아닌가. 토끼들은 나그네를 향해 다정하게 뛰어와 같이 가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나그네는 두 주일이 지나도록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베일리 씨 가족은 나그네가 머무는 게 좋았다. 그는 수줍었지만 가족 속에 친근하고 편안하게 녹아들었다. 베일리 씨를 도와 들판에서 갈퀴질도 제법 잘 해냈는데,  땀도 흘리지 않았고 전혀 피곤해하지도 않았다.  


베일리 씨 가족이 일을 쉬는 주말일까? 그림책을 절반 가량 넘기면 아빠가 바이올린을 켜고 엄마는 피아노를 치고 나그네와 아이가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몸이 간질간질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그 속으로 뛰어들고만 싶다. 


다시 표지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아이 이름은 캐티. 캐티의 표정은 궁금증이 한가득이다. 이 사람은 누굴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이의 눈을 보면 호기심과 함께 애정도 듬뿍 담겼다. 난 당신이 참 좋아요, 라는 말이 아이의 온몸에서 읽힌다. 하지만 나그네는 이런 캐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른 데를 보고 있다. 저 멀리,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나그네는 새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나그네가 머무는 2주 동안 여름은 베일리 씨네 농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계절이 바뀔 때가 되었건만 베일리 씨네 농장은 초록이 짙다. 나그네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런데 당최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에서 이파리 한 잎을 따서 무심코 훅! 바람을 불었는데...



알았다!!! 생각났어!


그림책의 내용을 모두 다 알려주면 안 될 것 같으니 여기서 멈추자. 그 뒤에 베일리 씨네 농장에서 매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가을이다. 가로수가 물들고, 산도 물들고, 노란색 빨간색 주황색 이파리들이 한 장 두 장 길을 예쁘게 덮고 있다. 내가 사는 이곳에도 나그네가 다녀간 모양이다. 


표지를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아릿하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이고, 한 해가 저무는 계절이기도 하고, 새가 떠나고 있어서일까? 나그네도 '왔다가 떠나는' 이다. 가을은 아름답지만 저물고 떠나는 이 느낌 때문에 이렇게도 아릿한가 싶다.  


화가 세잔은 생빅투아르 산을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하는데, 그가 종종 그렸다는 빛이 '늦은 오후의 강렬한 붉은빛'이었다고 한다. 그가 친구에게 했다는 말:


생빅투아르를 좀 보게... 태양을 향한 저 다급한 갈구, 모든 무게가 가라앉는 저녁에 멜랑콜리해지는 모습을. 저 돌들은 불덩어리야. 아직도 저 안에 불꽃이 있다고.


아직도 불꽃이 있다... 


맞다, 가을도 늦은 오후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붉은빛으로 다가온다. 그 불꽃은 밖으로 퍼지지 않고 안에 품은 빛이다. 여름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흰빛에 가깝다면 가을의 불꽃은 붉은 황금빛이다. 황혼 녘의 태양처럼. 


그림책의 표지처럼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4시 무렵, 집 뒤편의 작은 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보러... 


*세잔에 대한 이야기는 마이클 키멜만의 <우연한 걸작>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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