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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Jul 05. 2021

그림책에서 만나는 마음

<숲 속에서>마리 홀 에츠 글/그림



1944년도에 나온 그림책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마리 홀 에츠는 1893년에 태어났으니 이 그림책을 만들 때의 나이가 40대 후반입니다. 그림 솜씨와 글 솜씨가 노련해지고, 무엇보다 마음이 원숙해지는 시기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글과 그림이 너무나 잘 어울리고, 동물들의 표정과 숲속 그림자와 분위기가 조화롭고 풍부하며, 글의 운율이 잘 살아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너그럽고 깊은 이해심이 아이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림책을 펼치면 어린아이가 나오고, 아이는 혼자 숲 속에 있어요. 어른은 없습니다. '혼자'는 환상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숲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이가 환상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일 테지요.



아이는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종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아이는 겁도 없습니다. 혼자서 이제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가요. 

하지만 이것은 모험이 아니라 산책입니다. 그래서 평화로워요.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숲 속을 산책했습니다.


아이는 제일 먼저 사자를 만납니다. 

낮잠을 자고 있는 사자입니다. 

사자는 나팔 소리에 잠을 깼어요. 

사자는 물었어요. 

"머리 빗고,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머리숱 많은 사자가 머리를 빗고 아이를 따라나섭니다.  





나는 숲 속을 산책했습니다.


이이는 여러 친구들을 만나요. 

목욕하는 아기코끼리 두 마리를 만납니다. 

땅콩을 세며 잼을 먹고 있던 곰 두 마리도 만납니다. 


나는 숲 속을 산책했습니다.


깡충뛰기를 하고 있는 캥거루 가족도 만나고,

늙은 회색 황새,

나들이 옷을 차려입고 따라나서는 작은 원숭이 두 마리도 만납니다.

"행진이야, 행진!"


나는 숲 속을 산책했습니다.


풀 뒤에 숨은 토끼 한 마리도 조용히 아이를 따라나섭니다.


나는 숲 속을 산책했습니다.


아이는 나팔을 불고, 사자는 어흥 하고, 코끼리는 부우 하고, 곰은 으르렁, 캥거루는 북을 칩니다. 황새는 부리를 맞부딪히며 딱딱거리고, 원숭이는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칩니다. 토끼는 조용, 합니다. 


나는 숲 속을 산책했습니다.


이제 공터에 왔네요. 모두 산책을 멈추고 땅콩도 먹고 잼도 먹고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도 먹습니다. 

둥글게 모여서 수건 돌리기 놀이를 합니다. 남대문놀이도 합니다. 숨바꼭질도 합니다. 친구들이 모두 숨었어요. 


"찾는다!" 소리를 지르고 눈을 떴더니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아빠가 있어요. 아빠가 묻습니다:

"누구한테 말했어?"

"내 친구들한테요. 다 숨어있어요."

"너무 늦었어. 집에 가자. 네가 여기 다시 올 때까지 친구들은 기다려줄 거야."



"안녕! 멀리 가지 마! 다시 산책하러 와서 너희들을 찾을게."




그림은 흑백으로만 그렸습니다. 숲 속의 여러 빛깔들이 모두 생략됐지만 그림책을 넘기면서 이상하게도 색깔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상상으로 보는 빛깔들은 더 미묘하고 다채롭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이기도 해요. 사람마다 모두 다른 색을 볼 테니까요. 


아이가 상상하는 세계 속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가 안전합니다. 사자도 곰도 다정하고, 토끼는 웬일인지 얌전하고 말이 없네요. 황새 역시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행진할 때 보니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아이는 동물들과 먹고-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기쁨은 먹는 게 아닐까요?-

놉니다-노는 것도 역시 우리에게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입니다. 

먹고 논다는 것, 모두 몸과 관련된 일들입니다.  

그리고 같이 먹고, 같이 놉니다. 

추억의 놀이이자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놀이인 수건 돌리기를 하네요!  서로 둥글게 마주 앉아서 내 등 뒤로 떨어질지도 모를 수건을 기다리며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웃던 추억은 아주 오래된 사진의 풍경입니다. 


오래된 그림책이지만 정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왤까, 생각해보니 어린이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동심이라고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백 년 전에도 이백 년 전에도 '이렇습니다.' 백 년 뒤에도 이백 년 뒤에도 이럴 거라고 믿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은근히 두려운 마음도 있어요. 혹시 현대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서 영영 '아이의 시간'을 뺏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닐 겁니다. 아이들은 항상 아이일 수밖에 없는 시간이 있고, 그 짧고 찬란한 시기가 이후의 길고 긴 어른의 시간을 비춰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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