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깨끗함보다 어두운 그림자가 더 좋다
나의 브런치 매거진이자 브런치북인 <나의 사적인 영화공간>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글을 새로 써야 할지 고민을 하다 정여울 작가의 북클러버에 다녀왔다. 정여울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나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았다. 꼭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 더 있었구나, 저 사람도 나랑 똑같은 이유로 고민하고 힘들어했구나 하는 생각에 큰 위로가 되었다. 두 사람의 성격이 비슷하니 반 고흐를 사랑하는 것 역시 비슷했다.
북클러버에 다녀온 이후 반 고흐를 주제로 해서 어떤 글을 쓸지 계획도 세우고 정보도 많이 수집했지만 어떻게 시작할지를 몰랐다. 새로운 매거진을 여는 글로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할지, 기존 매거진과는 달리 하나의 완결된 글로 쓰고 싶었기 때문에 시작하는 글이 따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3주 정도를 헤매다가 얼마 전 재미난 일을 겪었다.
나의 삶은 덕질로 이루어져 있다. 언젠가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보고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무엇일지 고민했었는데, '덕후'라는 단어가 나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해리포터를 좋아하고 디즈니와 픽사의 작품을 사랑한다. 아이돌은 내 인생에서 반 이상을 덕질했고 다음 주에는 콘서트에 갈 예정이다. 한 때는 프랑스 파리를 덕질해서 교환학생도 파리로 다녀왔다. (실제로 교환학생 면접 때 파리가 아니면 안 된다고, 안 갈 거라고 면접관에게 으름장까지 놓았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덕질을 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내 짝은 '그렇게 디즈니, 디즈니 거릴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좀 더 해봐'라는 말을 남기고 서울대에 갔고, 전 남자친구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나를 보며 '사람이 저렇게 덕질을 할 수도 있구나'하면서 신기해했다. 아무튼 오랫동안 나는 덕후의 삶을 숨기고 살았다. 반 고흐 역시 그중 하나였다.
참 신기했던 게, 정여울 작가 역시 자신이 반 고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꽤나 나중에 깨달았다고 한다. 반 고흐가 워낙 유명하고 대중적인 화가이다 보니, 글을 쓰는 작가로서 '내가 감히 누구나 좋아하는 반 고흐를 좋아하다니! 좀 더 마이너 한 화가를 좋아해야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의 덕심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다 어느 날 일본에서 반 고흐의 작품을 보기 위해 5시간을 기다리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아, 내가 반 고흐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내가 반 고흐를 좋아한다고 깨닫게 된 건 영국 드라마 <닥터후>의 한 에피소드를 보게 된 이후였다. 사실 그 전에도 반 고흐의 작품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인상주의 화가로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그렸는지는 잘 몰랐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쯤에 <닥터후> 시즌6 중 한 에피소드를 보았다. 이 에피소드에 관해서는 나중에 글로 다시 한번 다루겠지만, 반 고흐 팬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비록 팬으로서 보기에는 고증 오류가 많다 못해 흘러넘치지만, 반 고흐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위로를 담아낸 아주 훌륭한 에피소드이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반 고흐는 그야말로 불행한 삶을 산다. 이웃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부랑자 취급 혹은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던 반 고흐의 전부였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있었다. 그런 불행한 삶 속에서도 예술의 극치를 추구했고 사랑을 원했다. 그가 홀로 남기를 선택했다고 줄곧 생각해왔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저 불행한 삶이, 그의 주변 환경이 그를 고립시켰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행이 그의 작품을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자신의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이 나를 눈물 나게 만들었다. 비록 나는 그만큼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하기엔 충분히 넉넉하고 감히 그의 고통의 정도를 상상할 수 없지만, 그 역시 불행을 택하지 않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평생 애썼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나를 울렸다. 나는 반 고흐의 작품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그의 삶이 나의 삶과 닮아있어서, 그의 삶을 사랑해서 반 고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반 고흐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모았다. 그야말로 덕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덕질의 끝판왕은 프랑스 교환학생을 갔을 때 그가 살던 도시에 모두 찾아가 본 것이었다. 아를, 생 레미, 파리의 뒷골목,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모두 찾아가면서 그가 걸었던 길을 걷고 그가 보았던 풍경을 보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놓쳤을 수 많은 장면들을 그는 포착해냈고 그만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러다 얼마 전 친한 선생님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날 남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 이와 어울리는 핸드폰 케이스를 고르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테마로 한 케이스를 선택했다. 그 케이스를 보고 한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반 고흐 좋아하세요?"
"네!"
"사람들이 반 고흐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진입장벽이 낮아서 그런가? 개나 소나 다 좋아하네."
그저 말문이 턱 막힐 따름이었다. 반 고흐의 오랜 팬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설령 내가 반 고흐 덕후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저런 말을 좀 너무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 단 한 마디로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게 되었고 그리고 덕분에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반 고흐는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평생을 맞서 싸우는데, 그는 죽어서도 여전히 몇몇 사람들에게 저런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화도 났다.
내가 이 매거진을 기획한 이유는 나의 덕질을 만천하게 알리고 싶어서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나 깊게 반 고흐를 덕질하고 있다고 자랑을 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상처로 가득한 그의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다시 한번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글을 쓰면서 나 역시 상처를 극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반 고흐를 잘 모르던, 잘 알고 있던 상관없다. 그저 나의 글을 읽고 저런 못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적어지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정여울 작가의 북클러버에 참여하고 내가 썼던 글을 짧게 소개한다. 작가님이 마음에 드신다고 직접 읽어주셔서 나에게 큰 행복을 주었던 글이다.
당신의 삶이 오로지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당신의 발자취에는 온통 빛과 아름다움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 그곳에 빛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그 길을 걸어 그곳에 빛이 생긴지는 모르겠다. 다만 당신이 끊임없이 빛과 사랑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신 역시 그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