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과 진행
※개인적인 경험이 다소 많이 들어있는 내용으로, 참고만 부탁드립니다.
이전 글에서 약물에 대해 얘기했으니, 이제 치료 과정에 대한 이야기할 차례다. 곧장 상담 내용으로 들어가려는 건 아니다. 그 전에 우울증 환자의 일상이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이것을 정상 상태로 돌리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노력이 무엇이 있는지 먼저 말해야 하니까. 그래서 이번 글은 개인적인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울증에 걸리고 제일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일종의 노력이라는 것이다. 하루 20시간 이상을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물을 마시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씻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루 한 끼를 시리얼로나마 때울 수 있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당연히 학교에 출석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본가에서 나와 기숙사 생활 중이었기 때문에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자연히 일상이 피폐해져만 갔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가 한 가지 있다. 운동을 하면 행복해지는 호르몬이 나오고, 씻으면서 수용성인 우울도 흘러가니 운동을 시도하면 좋지 않으냐고. 그런데 건강한 사람도 쉽게 시도하기 어렵고 작심삼일로 끝나기 일쑤인 운동을 우울증 환자가 나서서 지속적인 노력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설마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해야지, 라는 생각을 바로 행동에 옮겨서 루틴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신과를 찾아갈 일이 극히 드물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이 이야기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게으름’이라는 똑같은 결과로 보인다고 그 동기마저 단순 게으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할 시절 흔하게 나타나곤 했던 우울 삽화의 한 조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공감까지는 막지 않겠지만, 전염되지 않게 주의하길 바란다.
저녁노을이 창문에 비칠 무렵, 겨우 눈을 뜨면 잠을 충분히 잔 것 같은데도 피로감이 온몸을 짓누른다. 오늘 역시 일상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한 조각, 며칠째 씻지 못해 찝찝한 잠자리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이 한 조각, 또 그래도 배는 고프니 물로라도 배를 채워야겠다는 위기감이 한 조각씩 떠오른다. 이 모든 과정이 느리기 짝이 없어서 눈을 뜨고 머리를 들어올리기까지 한 시간여가 소요된다. 비척비척 걸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이 더럽기 짝이 없지만 오히려 그게 지금 나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누구에게 좋게 보일 생각도 없으며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인데 굳이 씻어야 할까? 결국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곤 슬리퍼를 끌며 편의점에 간다. 최소한의 가성비로 고를 수 있는 빵 몇 조각과 조금만 마셔도 갈증이 채워지는 이온 음료를 골라 다시 방 안에 처박히면 벌써 별이 떠오른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껴져서, 사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단절감이 든다. 정상인처럼 일상을 소화하고 싶어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시간의 속도에 야속함을 느끼면서도 결국엔 내가 문제다. 일정을 확인하고자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아서 대충 빵을 씹어 삼키고 이불에 파묻힌다.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도 않아서 다시 눈을 감고 잠이 찾아오기를 비는 것이다. 내일은 꼭 기분 전환하러 나가봐야지, 생각하면서.
그렇게 어느 날은 운 좋게도 맛있는 걸 먹으러 나가보고는 하지만 그걸로 에너지가 소진되어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에 이미 지쳐버리고 만다. 그러면 꼭 ‘괜히 나갔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세상과 유리된 공간 안에 처박혀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루 종일 씻지도 먹지도 않고 잠이나 자며 노닥이는 모습이 겉보기에는 게으른 백수의 이미지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내가 공유한 우울 삽화가 과연 그 이미지에 맞게 보이는가? 나는 저 상태에서 한 걸음 떨어져 보고 나서야 저조차 자기 학대 수단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지 못하니 나를 돌볼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반쯤 산송장과 같은 상태로 살다보면 최소한의 생존 욕구조차 거세되고는 한다. 그러니까, 이건 충분히 병적인 상태이다. 그런 사람에게 당장 운동을 하라고 하는 것은 이제야 겨우 배밀이를 하는 갓난 아이더러 달리라고 하는 격이다. 그래서 난 치료를 시작하며 딱 네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루에 두 끼 이상 먹기
-하루에 물 두 잔 이상 마시기
-매일 한 번씩 씻기
-평소에 보고 싶었던 컨텐츠 한화씩 보기
(소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상관없이)
‘병을 핑계로 게으른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때면, 난 그 생각이야말로 이게 내가 원치 않은 우울증으로 인한 증상이라는 증거라고 몇 번이고 나 자신을 진정시켰다. 이런 생활조차 치료의 과정이니까 괜찮다고, 괜찮아질 수 있다고.
누가 보기엔 한심해 보이기 짝이 없더라도, 나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재활의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