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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북을 듣게 될 줄이야

도스토옙스키, 까라마조프 형제들

by 윤서


뜨개질의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디오북을 5분 이상 들어본 적이 없던 내가 지난 몇 달 동안엔 꽤 많은 오디오북을 들었다. 뜨개질 덕분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일의 능률이나 더 나은 방식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편이라선지 뜨개질을 하면서도 뭔가 덜 채워졌다는 느낌, 혹은 시간을 좀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순수한 뜨개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물에서 뿌듯한 성취감도 느끼고, 새로운 기법을 배우는 과정이 너무 재밌고, 뜨개질이 주는 '힐링'에 대해서는 거의 예찬을 하면서도 마치 지문처럼 남아있는 시간 사용에 대한 긴장감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습관성이 된 체증처럼, 뭔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불안이 마치 놋쇠 주전자에서 물이 끓기 직전의 소리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정작 물이 끓기 시작하면 금세 사라질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불안이긴 하지만.


내가 뜨는 코바늘 모티프는 반복되는 같은 무늬가 아니라 거의 매 '단'마다 다른 도안이라서 영상을 계속 확인하면서 떠야 한다. 하지만 영상은 분량을 위해 편집을 하기 때문에 영상을 정지시키고 화면 아래에 써놓은 도안 설명만 보면서 뜨다가 단이 바뀌면 잠깐 영상을 돌린 후 다시 정지시키기를 반복하며 뜬다. 그래서 아예 무음으로 하고서 창을 하나 더 열고 오디오북을 틀어놓는다. 눈은 뜨개질 화면, 귀는 오디오북. 내가 좋아하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은 괜한 뿌듯함을 동반한다.

요즘 들어 시간의 흐름에 딴지를 걸지 않고 여유롭게 하루를 보내는 것에 제법 익숙해져서 그 슴슴한 맛을 즐기고 있지만 그래도 천성은 안 변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에 나는 여전히 짜릿함을 느낀다.


오디오북을 처음으로 들어본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독서가, 지치고 피곤해서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일의 범위로 들어갔을 때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게 오디오북이었다. 하지만 말소리의 높낮이나 말투에 꽤 예민한 편이라서 썩 좋은 방법이 아니란 걸 금세 깨달았다. 얼핏 생각하기엔 책을 들고, 읽기, 위한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고, 심지어 편하게 누워서도 책을 읽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더할 수 없이 편하게 책을 만나는 방법일 것 같은데 막상 해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책을 읽는다는 의미 속에는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영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포함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의 고유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오디오북이 되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일단 낯선 목소리가 개입되어서 스스로 책을 읽을 때와는 연상작용의 속도와 색깔이 좀 달라진다.

게다가 이 목소리나 톤이 내 안의 목소리와 맞지 않아서 자꾸 덜그럭 거리면 오디오북을 계속 듣기 위해선 슬슬 인내심이 필요해진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어설픈 대타처럼 과잉된 감정 표현으로 뒤범벅이 된 대화체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마치 화난 사람처럼 후다닥 꺼버리고 만다. (쓰다 보니 세상 힘든 일이 낭독인 것 같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것저것 오디오북 듣기를 시도해 보다가 유튜브에서 <책 들려주는 창가>라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귀한 고전들을 완독 해서 올리는 곳이었다. 게다가 책의 분량으로 치면 거의 벽돌이나 베개 수준인 익숙한 러시아 문학도 있고 그리스 로마 신화와 중국의 유명한 고전도 있었다.

그중에서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맨 처음 들었다. 오래전에 읽기 시작하고서 끝내지 못했던 기억이 나서 반가웠다. 총 43시간 41분. 중간에 잠깐씩 되돌려 듣거나 아예 전체를 두 번 들었던 '대심문관' 챕터까지 합하면 46시간도 넘을 것

까라마조프 형제들이 거의 끝나갈 무렵 문득, 죄와 벌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면 너무 무거워질 것 같아서, 디저트로 진한 초컬릿 케잌과 뜨거운 커피를 마시듯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가볍게 들은 후, 푸시킨의 '대위의 딸'을 단정한 마음으로 듣고, 지금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들으며 소피스트 학파의 대화법에 지쳐가는 중이다.


이러는 동안 공평하게(?) 큰 아이에게도 줄 담요의 모티프 36개를 다 끝냈다. 이제 서로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색깔의 취향을 존중해서 뜨다 보니 절반 정도가 같은 문양의 모티프인데도 분위기가 전혀 다른 담요가 될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긴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러시아 출판사는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주었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가 일부러 길게 썼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아니니 그는 정말 타고난 스토리 텔러인 것 같다. 거의 44시간의 낭독이 필요한 소설을 읽었는데도 아직 그가 알고 있고 쓰고 싶은 것들이 무진장 더 남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 한 편의 소설 속에는 종교, 정치, 관습, 인간관계, 심리학 등등... 인간이 끌어안고 살아가는 거의 모든 것들이 있다. 그의 소설은 밀당의 고수고, 너무 세세해서 시시하게 느껴질 법도 한 대화나 설명에도 특유의 맛깔스러움이 있다.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마치 종합 선물세트 혹은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모두 살 수 있는 오래된 전통시장 같기도 하다.


아버지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는 인간이었던, 살해당한 아버지를 둘러싼 세 이복형제, 드미트리, 이반, 알료사와 사생아로 태어나 자식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스메르자코프, 그리고 카테리나와 그루센카라는 두 여인이 줄거리의 큰 축을 이룬다. 하지만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여느 일반적인 소설들처럼 스토리가 자체가 글을 끌고 가는 힘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깊게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본질을 탐구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생각과 사상을 따라가는 맛이 더 큰 감동으로 읽히는 소설이다.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다. 책 앞부분의 헌사에,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바친다>.라고 쓰여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 가난하면서 도박에도 빠져있던 그는 그야말로 돈을 벌기 위해서 글을 썼는데 당시 러시아의 출판사는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소설을 출판사에 넘기려고 고용한 속기사가 바로 '안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도스토옙스키의 팬이었고 24살이나 어렸지만 결국엔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서 네 아이를 낳았다.(두 아이는 일찍 죽었다.) 그는 안나와 결혼하면서부터 모든 면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며 좋은 작품을 썼고, 경제권을 넘겨받은 안나 덕분에 생활고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안나는 재혼을 하지 않고 두 아이를 키우고 그의 작품을 관리를 하면서 평생을 살았고 이런 자신의 삶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영원히 그의 아내로 남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끝내고 2편을 쓸 예정이었는데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도스토옙스키가 추구했던 러시아의 정체성은 바로 '모두 다 함께'라는 전체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까라마조프 형제의 마지막 장면인, 안타깝고 슬픈 장례식을 마치고 동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알료사와 아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러시아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살아서 2편을 썼다면 어떤 소설을 썼을지 예측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책 들려주는 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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