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uncheon _ 윌리암 서머셋 모옴의 단편 '점심'
윌리엄 서머셋 모옴의 단편, ' 점심( The luncheon)을 읽었다. 읽는 내내 자꾸 큭' 풋' 하하' 웃는다.
'인간의 굴레'나 '달과 6펜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다. 내용은 어느 독자와 작가의 점심 식사 중에 생긴 일이다.
가난한 작가는 간신히 한 달을 버틸 돈밖에 없는데 애독자라는 그녀는 여행 중 파리를 지나는 길에 잠깐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어디 한번 가볼까?'라는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 아주 유명하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사달라고 한다. (작가에게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게 아니라 사달라고 할 때부터 어쩐지 '조스'의 주제곡이 코미디 버전으로 시작된 느낌이었다. ㅎ) 간신히 한 달 생활비 정도의 여유밖에 없는 그는, 좀 걱정을 하면서도 평범한 점심 식사를 한다면 몇 주 정도 커피를 사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와 그녀가 만났다.
그녀는 생각보다는 나이가 들고, 치아가 필요 이상으로 튼튼하고 많아 보이는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그는 메뉴판에서 레스토랑의 음식값이 그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다는 걸 발견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자기는 점심을 잘 먹지 않지만 정 먹어야 한다면 딱 한 가지만 먹는다는 말로 그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 건 아직 철이 아니라서 메뉴에도 없는 연어요리였다. 그러니 당연히 비싸다. 그는 어떻하든 식사비를 줄여보려고 자신을 위해서는 가장 싼 양고기를 시킨다.
그러자 그녀는 그를 나무란다.
그렇게 고기를 먹으면 위가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글을 쓰겠냐고. 자기처럼 가볍게 한 가지만 먹으라고.
(네네..)
그리고 점심엔 아무것도 마시지 않는다던 그녀는 금세 또 말을 바꾼다.
그녀는 프랑스 와이트 와인을 좋아하지만 의사가 오직 샴페인만 마시라고 했다면서.
그는 자기는 의사가 샴페인만 먹지 말라고 했다며 반 병을 시킨다.
점심을 가볍게 딱 한 가지만 먹는다고 했던 그녀는, 웨이터가 와서 연어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뭘 좀 먹겠냐고 하니까 난 원래 점심으론 한 가지만 먹어요, 하지만 캐비어가 있다면 먹겠어요.라고 선심 쓰듯 말한다. (하이고야...)
그리고 나서도 그녀는 다시 나는 원래 점심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지만 파리까지 왔으니(비싼) 아스파라거스 요리가 있다면 그건 먹겠다고 한다. 그도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싶지만 돈이 모자랄까 봐 오로지 양고기만 먹는 식습관이 나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가 후식으로 커피를 마실 때 그녀는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음식은 뭔가 모자란 듯할 때 그만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중에 주방장이 들고 나온 제철이 아니어서 '비싼' 복숭아도 하나를 날름 집는다.
양고기 한 접시 앞에 놓고 다른 건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에게 그녀는, 양고기처럼 무거운 음식을 많이 먹으니까 이렇게 맛있고 가벼운 복숭아도 못 먹는 거라며, 자기는 간단하게 먹었으니 스낵으로 하나 먹겠다고 한다.
그녀가 쉬지 않고 말하는 예술이니 문학이니 따위는 이미 그의 안중에 없다. 이젠 생활비에서 얼마나 쓰게 될까,가 아니라 돈이 모자라면 어떡할까,라는 공포 수준의 걱정뿐이다. 그는, 돈이 모자라면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거나 시계를 잡힐 생각까지 한다. 돈이 모자랄까봐 속으로 전전긍긍하는 소설속 작가의 심리묘사나 툭, 던지는 말들이(물론 그녀는 속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퍽 재미있다.
음식값은 간신히 되었지만
웨이터 팁은 조금밖에 주지 못하자 그녀는 그를 인색한 사람 보듯 쳐다본다.
이 달 말까지 써야 할 생활비가 점심 한 끼로 다 날아갔다.
더구나 자기는 양고기 한 접시 밖에 안 먹었는데..
헤어질 때, 택시에 오르던 그녀가 또 말한다. 자신을 좀 본받으라고. 정말 자기처럼 점심엔 가볍게 딱 한 가지만 먹어야 한다고. (네네.. 딱 한 가지씩 여섯 번 먹었지요.)
그녀는 어디선가 본 듯한
혹은 내가 보지 못했다 해도 어디엔가 꼭 있을 것 같은,
(어쩌면 한 번쯤 당했(?)을까... ㅎ)
그런 캐릭터다.
무례하고 뻔뻔하고 모순적이지만
그녀에 대해서조차도 자꾸 실실 웃음이 나는 건,
서머셋 모옴의 문장력 덕분일 것이다.
안쓰럽고 불운한 양고기를 먹었던 저 점심 식사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연극 공연을 보러 갔던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난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말해주기 전까지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먼저 아는 체를 한다. 오랜만이에요. 20년 전에 제게 점심을 먹자고 제안하셨잖아요. (잉? ㅎㅎ)
이십 년 전에도 그녀에게 불평은커녕 난처한 티도 내지 못했고, 지금도 그녀의 터무니없는 기억의 왜곡에도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지만 그녀를 보며 그는, 나름 복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문장이, Today she weighs twenty-one stone. 이다.
느낌상 그녀가 뚱뚱해졌다는 뜻인 건 알겠는데 'stone'이라는 단위가 생소해서 찾아봤다.
1 stone = 14 pound
21 stone =294 pound
294 pound = 133.356 kg
그의 소극적 복수가 귀여워서 소리 내 한참 웃었다.
이렇게 무심한 듯 간결하게 툭, 떨어지는 짧은 한 문장으로 모든 걸 평정(?)하는 마무리를 좋아한다. 그렇긴 해도 격하게 카타르시스가 되는 걸 보니 어쩌면 나도 소설속의 작가처럼 '소극적 복수' 스타일이 체화된 건 아닐까.
만약 그녀에게,
그동안 살이 많이 찌셨네요?라고 한다면
그녀는 꼭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나는 물만 먹어도 살이 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