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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대위의 딸'일까?

푸쉬킨의 소설, 그리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by 윤서



# 제목이 왜 '대위의 딸'일까?


'대위의 딸'은 700여 편의 시를 쓴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이 1836년에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푸쉬킨은 1773년에 실제로 있었던 '푸가초프 반란'사건을 두 달 동안 조사한 후에, 3년 넘게 걸려서 이 소설을 썼다.

심한 농노 혁명을 겪었던 18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반란군과 정부군의 충돌에 노출된 각양각색의 인물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인간으로서의 예의, 의리, 명예, 사랑 등을 지키려는 평범한 귀족 청년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 바탕의 역사소설이다.


글을 쓸 때 꽤 고심하게 되는 게 제목이다. 제목은 그 글의 '첫인상'이기도 하고 내용을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압축해 놓은 효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위의 딸'이란 제목은 다소 의외였다. 책의 제목으로 특정인을 언급했다면 그건 대개가 주인공이기 마련인데 소설 속에서 대위의 딸인 '마샤'는 그리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에 마샤의 활약이 해피 앤딩에 큰 역할을 담당하긴 하지만, 주인공이란 한 번의 중요도보다는 분량 면으로 말해준다는 걸 생각할 때, 제목이 '대위의 딸'인 이유를 거듭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위의 딸은 한 마디로 전쟁 소설이다. 남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게다가 대위의 딸인 '마샤'와 '표트르'는 거의 대부분 서로 만나지도 못한 채 멀리 떨어져서 지내고, 앞에서 언급했지만 마샤의 분량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단지 마지막 부분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고 생각하기엔 푸쉬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뭘까?


그러니까, 그녀 덕분에, 그녀가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도 단지 그녀의 존재 덕분에,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는 것만으로도, 그는 심한 상처에서 회복되고, 점점 더 명예로운 남자가 되고, 용감한 군인이 되고, 훌륭한 인간이 되어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사실 푸쉬킨, 하면 반사적으로 바로 떠오르는 건 '삶'이란 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되는 이 시는, 밀레의 그림에서 '이발소'를 떠올리는 다양함이 부실했던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박제된 기억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시는, 식상하고 지루한 듯하지만 아직도 유효한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


이 시는, 읽은 것보다 지은 것이 더 많았던 내 동시의 세계를 끝내고 맨 처음 만난 어른의 시였다. 중학교 1학년이었고 내겐 최초의 '시'라고 기억하지만 기억은 곧잘 편집되고 왜곡되기도 하니까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일수도 있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아서 최초라고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삶의 숨겨둔 비밀을 발견한 것 같은 떨림이 있었던 기억은 여태도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뒤에 나오는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구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시는, 그 시절의 내가 기쁨보다는 슬픔에 익숙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는 숨겨둔 증거일 수도 있겠다.


지금은, 삶이 나를 속이면 슬퍼하기도 하고 노하기도 하며 살아가고, 미래를 향한 희망보다는 현실적인 체념이 더 익숙하고 편한 나이가 되었다. 살아보니 찬란할 줄 알았던 미래도 결국은 견뎌야 하는 현재가 되지 않던가.


오래전 서구의 관습 중에서 가장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투'라는 방식이다. 터무니없이 사소한 이유로 결투를 하고 목숨울 잃는 일이 흔했다. 말로 해도 되는 일 때문에 목숨을 걸로 싸웠던 것이다. '명예'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어리석은 관습이 이성을 누르고 있던 시절이었다.


많은 러시아 문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롤모델이 된 푸쉬킨도 자신의 아내와 얽힌 일 때문에 결투를 하고, 결국 39살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가 톨스토이만큼 오래 살았다면 러시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푸쉬킨도 자신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글을 실천하지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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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담요


오디오북으로 '대위의 딸'을 들으면서, 토론토에 사는 딸에게 줄 두 번째 담요를 마무리했다. 이제, 마치 만담 콤비같던 오디오북과 뜨개질을 당분간 쉬어야겠다. 촘촘하게 즐긴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보내기 위해 자라(zara)에서 온 포장지를 재활용해서 소포를 싼다. 같은 캐나다지만 내가 사는 서부와 아이가 사는 동부는 시차가 3시간이 날 정도로 멀다. 그러니 자주 볼 수가 없다. 담요를 뜨면서 올마다 숨겨놓은 그리움과 바람들 위에 슬쩍 하나 더 얹는다.


아이가, 삶이 자신을 속일 때마다

슬퍼하거나 노해야 하는지,

슬프지만 노하지는 말아야 하는지,

슬퍼서 노해야 하는지를

현명하게 판단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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