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을 읽는 밤
내 나름대로 파악한 나의 젊음과 늙음의 변곡점에 대한 증거가 있다.
그토록 좋아서 늘 끼고 살던 커피에게 배신당하고 온갖 디카페인 커피를 전전하다가 디카프도 커피라고, 알고 보면 카페인이 아주 쪼금은 들어있다고, 세뇌와 합리화를 거듭한 결과 맛이 아니라 습관으로 커피를 마시게 된 때가 그 첫 증거다. 그나마 '일리illy'가 나를 살렸다.
두 번째는,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아이의 눈치를 보고 충고를 듣고 있었다. 써클 어브 라이프, 게다가 새롭고 유익한 게 많아서 이 정도 베네핏이면 늙는 것도 괜찮구나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어릴 때부터 야행성이었다. 읽거나 쓰기에 삘' 받으면 밤도 자주 새웠다, 창밖이 뽀얗게 밝아오기 시작할 때 골목에서 들려오는 사락사락 비질하는 소리에 괜히 뿌듯했다. 내가 골목길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꼴값이라고 흉봐도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어릴 때 밤마다 듣는 소리가, 책 그만 읽고 자라.
그런데 언제부턴가, 심지어 12월 31일에도 밤을 새우지 못한다. 음력이 아니니까 좀 억지긴 하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지켜온 '섣달그믐엔 촛불 켜고 헛소리 쓰며 밤새우기'는 잊힌 나만의 세시풍속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눈썹이 하얗게 세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뻥' 치셨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이런 내가 어제는 밤을 꼬박 새웠다. 드문 일이다. 그동안 카페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 몇 번 사고를 친 적이 있는데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더구나 직장을 그만 둔 후로 낮 시간에 대한 부담이 없어지자 이른 아침에는 야곰야곰 카페인을 넘보는 게 자주 반복되다 보니 내가 카페인에 얼마나 취약한 체질이 되었는지 깜빡 잊고 오만 방자했다.
밤 아홉시가 넘었는데 카페인이 왕창 든 커피가 너무 먹고 싶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심정으로 찐~ 한 진짜 커피를 머그에 가득 내려서, 카페인의 공격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며 비장하게 마셨다. 게다가 카페인보다 더 독하게 영혼을 흔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시너지 효과가 어마어마해서 아침 7시에 겨우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 호화로운 자유에 감탄하면서.
'채식주의자'는 몇 년 전에 교보문고의 e-book으로 사서 읽었는데 아이가 영문으로 번역된 종이책을 읽길래 그럼 우리, 각자 다 읽고 나서 얘기 좀 할까? 아이패드를 뒤졌더니 얌전하게 잘 보관되어 있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개의 단편이 연작으로 엮인 장편소설이다.
스스로 파는 함정일 수도 있는데 나는 소설의 줄거리보다 문체에 더 탐닉한다. 사실 소설은 마흔 즈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한 번 읽고 꽂혀지는 책은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두세 번 다시 읽는 소설도 있다.내가 영혼의 빙하기 같은 한 시기를 지나온 적이 있고, 그때 경험한 숱한 자잘한 것들은 마치 얼음이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아채고 그때 내가, 나를 위해 시도했던 모든 것들에게 무효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평소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채식주의자'가 출판되고 꽤 긴 시간이 지나서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부커 프라이즈'를 거의 백 프로 신뢰했던 아이는, 아직 그 신뢰를 깨고 싶진 않지만 앞으로 인터내셔널 부분의 수상작은 읽지 않겠다고 한다. 다른 해에 최종 6명에 오른 한국작가의 소설까지 맛보기로 조금 읽고 나서 한 말이었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자주,
아프고, 숨막히고, 잔인하고, 슬프고, 화나고, 허망하고, 집요하고, 안쓰럽고, 막막하고,의 반복으로 함부로 헝클어지는 마음을 그녀의 실한 문장에 가두었다. 좋았다. 하지만 당분간 그녀의 다른 책을 찾아 읽을 것 같진 않다. 아직은, 숨쉬기가 조금, 고통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