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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06. 2023

'실패'라 쓰고 '행복'이라 읽는다

행복한 실패 _ foster failure

a foster fail isn't 'fail' at all, because everyone basically wins. your new dog or cat has a warm and loving home, and you have a best friend.


개나 고양이를 임시보호 하다가 자신이 입양하고 만 경우에 foster fail이란 표현을 쓴다. 이때의 'fail'이란 단어 속에는 실패에 대한 자괴감 따위는 없다. 임시보호를 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끝까지 실천하진 못했지만 기꺼이 실패한 자신에 대한 약간의 칭찬과 결국엔 입양하고만 동물에 대한 애정과 측은지심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두 달 전의 어이없는 입양 해프닝 이후로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때 우리는 1년 동안 기다려도 입양이 안되면 우리가 입양을 하자며 서로를 위로했지만 사실은 헌터를 위한 위로였다. 가끔, 헌터가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재밌을까, 따위의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 적도 있지만, 이때처럼 헌터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고마운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헌터가 한국에서 온 지 벌써 10개월이 되었다.


이제 2달 남았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집보다 더 좋은 곳으로 입양이 되리라는 희망은 여전했다. 그건 뭐랄까, 간절한 바람이라기보다는 결과가 무엇이든 받아들일 테지만 그래도 아직은 성급하게 결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유예의 시간 같은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기한을 정했고, 아직 그 기한은 남아있으니 내가 헌터의 입양을 바란다고 해서 헌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는 어쩌면 약간의 미안함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2달'이라는 기한은 내 성향에서 비롯된 쓸모없는 계획이란 걸 곧 알게 되었다.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꽤 여러 가지 재미가 숨어있어서 MBTI 검사를 한 적이 있다. 한글과 영어버전의 질문이 약간 다르길래 두 가지 다 해봤는데 결과는 똑같았다. 나는 INFJ고 아이는 INFP였다. 둘이 성향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를 때가 있는데 이 알파벳 하나의 차이 때문이었구나, 아! 너는 어지르고 나는 따라다니면서 치우는 것도 이 차이 때문인가 봐. 이렇게 낄낄대며 둘이 잘 놀았는데, 그렇다면 이 일도 J와 P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계획을 세우고 지키려는 엄마와 계획 따윈 아무 상관없다. 마음이 끌리면 그게 계획이라는 딸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차라리 묻지 말자. 뻔하다.


하윤은 오랜 고민 끝에 5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초창기보다 일도 쉬워졌고 얼마 전에 연봉도 올랐으니 표면적으로는 예상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늘 말하지만 세상의 모든 '갑자기'는 갑자기가 아니다. 그리고 곁에서 늘 지켜보았던 나는 그 '갑자기'에 적극 동의했다. 하이스쿨 때부터 대학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계속 알바로 자신의 용돈을 벌었던 아이니 나이에 비해 꽤 긴 취업경력이 있는 셈이다. 난 아이의 결단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이참에 좀 쉬자. 그만둔 직장은 경력으로 남을 테니 손해 날 것 없고, 직장은 다시 구하면 되고, 앞으로 일하며 살 날이 얼마나 긴데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잠깐씩 쉬어가는 것도 괜찮아.


이런 대화를 한 며칠 후, 헌터가 하윤의 침대로 껑충 뛰어올라가는 걸 보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윤은 그동안 헌터가 나쁜 버릇을 들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는데 특히, 자기는 상관없고 오히려 그걸 즐기고 싶은 쪽이지만 개가 침대에 올라간다고 하면 입양을 꺼리는 사람들(나 같은 사람들)도 있다며 절대 못하게 했었다. 처음부터 소파 정도는 허용해 주려고 했는데 헌터 스스로 소파에 올라간 것도 최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헌터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할 줄 알았는데 하윤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젠 침대에 올라가게 하려고?

엄마, 사실은 나... 헌터 입양했어.


사표를 쓸 때, 헌터의 입양신청서도 함께 작성한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나 몰래 헌터를 입양한 것이다. 그동안 임시보호와 입양사이에서 갈등하는 걸 알았기에 아이가 사표를 낸다고 했을 때, 그동안 애썼으니까 상 주는 기분으로 헌터를 입양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조금 망설이다 선수를 빼앗긴 이유는 우리가 정한 기한이 아직 두 달이나 남았기 때문이었다. (아, 지겨운 J.. 그러고 보니 내 미들네임 이니셜도 J 다.)


나는 잠깐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지만 꽤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큰 결정을 상의도 없이 했다고?  

엄마는 어차피 반대할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헌터를 입양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결정을 내렸어.

사실은 너한테 퇴사기념으로 입양하라 그러려고 했는데도 이 섭섭함은 뭐지?

아, 정말? 미안해 엄마. 그럼 잘된 거네. 당분간 비밀로 하다가 기회 봐서 말하려고 했는데.. 근데 엄마. 얘가 정말 똑똑해. 내가 입양한 다음날 바로 침대에 올라가는 거 있지. 그동안은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 내 속을 다 읽는다니까.


아이는 마치 마음의 짐을 벗은 듯 신이 나서 조잘거렸고 나도 말로는 쿨한 척했지만 감정조절과 표정관리에 실패한 걸 느끼고 얼른 돌아섰다. 사실 많이 섭섭했다. 마치 뒷방 늙은이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별 얘기 다하고 엄마가 자기가 베프라고 사탕발림을 할 땐 언제고 결정적인 순간이 되니까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이게 순리이고 '써클 어브 라이프'라는 걸 알면서도 나이가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 예민함을, 이 상처적 체질( 류근 시집 제목)을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나도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일이란 것을 알고,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를 워낙 좋아하는 데다 길다면 긴 10개월 동안 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함께 살았는데 어떻게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을 보내겠는가. 못 보낸다. 아이는 자기도 3,4개월 정도만 같이 살았으면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정말 임시보호를 꾸준하게 하시는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었다. 내 섭섭함은 단지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벌어진 해프닝일 뿐이다.


그리고, 아이가 직장을 그만두면서 바로 헌터를 입양한 건 나름대로의 큰 결심이자 새로운 각오라는 것도 안다. 유지하고 싶진 않지만 버리기엔 용기가 필요한 것을 버린 자리에 오래 망설였던 가장 좋하하는 일을 채워 넣고 그걸 에너지 삼아 다시 힘을 내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살다 보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결심이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만난 터닝포인트가 삶의 질을 높이기도 한다. 그럴때 필요한 건 버릴 것과 유지할 것을 분별하는 솔직함이다.


화기애애 혹은 만장일치의 분위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멀리서 온 시고르자브종은 젊은 호모사피엔스의 호적에 올라가면서 우리 식구가 되었다. 헌터 만세!


 

하윤은 회사를 그만 둔 후 두 달 동안, 헌터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가끔 친구도 만나고 요리도 하고 책도 읽고, 새벽에 헌터와 두 시간쯤 걸으면서도 일주일에 서너 번 요가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러 집 근처에 새로 생긴 YMCA를 다녔다. 어느덧 헌터가 캐나다에 온 지 1년이 되었다. 우리는 기념으로  barkuterie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charcuterie에서 따온 사전에는 없는 단어) 헌터가 평소에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만 자주 주진 않는 것들로 한 상 차렸다.


대형 중국마켓인 T&T에 가서 소간, 닭 심장과 모래주머니를 사다 우유에 담갔다가 삶아서 썰고, 너무너무 좋아하는 스테이크와 삶은 달걀, 평소에도 즐겨 먹는 사과와 치즈, 비스킷 놓고, 그린빈과 딸기는 먹었으면 싶은데 절대 안 먹는 것이지만 보기 좋으라고 장식으로 놓았다. 아이들이 아가였을 때 돌사진을 찍던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헌터가 행복해 보여서 이 사진이 참 좋다.(왜 안 좋겠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만든 종합선물세트인데.) 물론 이 많은 걸 하루에 다 먹은 건 아니고 보관했다가 날마다 조금씩 나눠 주었다.


구조된 녀석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나이는 추정나이고, 구조 후 첫 예방접종한 날짜가 생일이 되었다고 해서 밴쿠버로 온 날을 생일로 할까 하다가 어쩐지 우리 욕심 같아서 그만둔다. 밉든 곱든 지나온 모든 것이 헌터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헌터가 그야말로 진수성찬으로 차린 한 상을 받고 행복하던 날로부터 일주일 후, 아이는 새 직장에 취직을 했다. 한 달쯤 전부터 화상으로 몇 번의 면접울 봤는데 취직된 회사와의 면접은 무려 4단계였고, 마지막은 한 시간이 넘는 미팅이었다. 함께 일하게 될 팀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참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다행히 연봉도 더 높고, 근무 환경이나 베넷핏도 좋은 곳이라서 이전 직장을 그만둔 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럴 때 옛 어른들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헌터가 복덩이다. 입양하고 나니 더 좋은 직장이 생겼잖아.



그동안 맘고생, 몸 고생 많았던 우리 헌터, 먼 나라까지 와서 보이는 것, 소리, 냄새, 모든 게 낯설었을 텐데 잘 적응하고 있어서 참 고맙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이 가장 우월하고 우선되어야 한다는 잘못 학습된 이기심을 반성하게 하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선한 영향력이 되는 헌터는,


이제야,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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