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서 Dec 23. 2022

눈이 그렇게 좋아?

겨울왕국 헌터왕자



겨울이 벌써 문 앞에 서 있는 것도 모르고 11월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가을이 짐을 싸는 아침, 눈이 내렸다. 폭설주의보를 옆구리에 낀 눈발은 점점 더 부풀어서 퇴근길의 거리가 허둥댄다는 뉴스를 들으며 큰 사고가 없길 바라면서도 걱정은 잠깐, 아이는 재택근무 중이고 나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영상을 보듯 창밖의 설경을 바라볼 수 있음에 안도한다. 지금 길 위의 사람들은 그들의 시간을 치러내는 중이고, 나는 지금의 내 시간을 잠깐 곁에 앉혀두고 있는 중이니 이런 마음도 미안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년 12월까진 나도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길 위에 서 있었으니까.


그런데 불과 일 년 전의 기억이 왜 이리 까마득할까. 아마도 지난 일 년이 내 삶에서 드물게 공간적 변화가 많은 한 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공간의 변화는 심리와 습관, 관계의 변화까지도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 준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 공개적이지만 은밀한 비밀의 맛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꾸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집 떠나면 불편하고 고단하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 시간은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떤 일들은 그리 오래 전도 아닌데 금세 흐릿하게 잊히는데 어떤 일들은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도 생생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시간 혹은 우리가 세월이라고 부르는 것은 숫자가 쌓이는 것과는 무관한, 우리의 마음을 통과하는 흐름인 게 분명하다.

그래서 터무니없이 멀게도 가깝게도 느껴지고, 추억이 되지 못한 기억들은 언제나 위로받을 곳을 찾아 헤맨다. 그게 어떤 장소일 수도 있고, 어떤 행위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엔 깨닫는다. 이 모든 것들이 - 상처 입은 기억이란 결국엔 스스로 봉인해야 할 시간임을 알아채기 위한 - 과정일 뿐이란 것을.


조금 이른 눈으로 시작한 12월 내내 자주 눈이 내린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겨울에 눈이 거의 없고 따뜻하던 BC주의 날씨도 이젠 옛말이 되었다. 밴쿠버는 원래 겨울 우기가 몇 달씩 계속되고 평균 기온이 영상이던 곳인데 몇 년 전부터는 자주 폭설이 내리고 기온이 동부보다 더 낮을 때도 있다. 눈 오는 아침엔, 특히 휴일 아침엔 따뜻한 이불속에서 뭉그적대거나 포근하고 뜨거운 음식으로 늦은 아침을 먹어야 제맛인데 눈이 오든, 길이 꽁꽁 얼었든 우린 나간다. 달콤하고 게으른 휴일 아침을 헌터와 바꾼 셈이다.




밤새 폭설이 내리고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졌지만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 아이와 나는 옷을 몇 겹 씩 껴입고 마스크를 하고 장갑을 끼고 스노우 부츠를 신고 나가지만 헌터는 맨몸에 하네스만 한다. 비 올 때 입히려고 옷을 하나 사긴 했는데 워낙 추위에 강하고 털이 젖어도 잘 마르는데다 무엇보다도 헌터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 한 번 입히고 말았다.




누군가 눈을 치웠는데도 다시 쌓여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걷다가 고개를 들면 풍경의 원근이 사라지는 아침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감상에 오래 머물기는 힘들다. 우리의 달콤하고 게으른 휴일 아침과 바꾼 헌터의 겨울아침은 마냥 신난다. 마치 우리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추위와 눈을 너무 좋아해서 우리를 자꾸 웃게 만든다. 헌터는 눈보라를 맞으며 눈길을 걷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있거나 일부러 눈이 많이 쌓인 곳으로 들어가서 수영하듯 눈 속에 잠긴다. 눈이 그렇게 좋니? 헌터는 비씨 주 말고 다른 주로 임시보호를 갔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유일하게 눈이 가장 안 오는 곳으로 왔네. 하지만 개에게 가장 중요한 건 환경이 아니라 주인과의 유대감이라고 하니, 그나마 이 정도라도 춥고 눈이 잦아진 겨울을 감사해야겠다. 헌터를 위해서.


크리스마스 디너를 준비하면서 헌터에게도 스테이크를 구워서 주었다. 얼마나 좋아하며 잘 먹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얘, 육식동물 맞네. 해미네가 헌터의 선물을 보냈다. 어마무시하게 큰 진짜 동물뼈였다. 그동안은 곡물로 만든 덴탈본과 갉아먹어도 되는 작은 뼈를 주었었는데, 이걸 먹는 건지, 아니면 플라스틱 본처럼 그냥 갉기만 하는 건지 몰라서 고민했는데 진짜 뼈니까 먹어도 될 것 같았다. 헌터가 좋아할 게 분명하니까 지금 주지 말고 나중에 뇌물이 필요한 상황이 오면 주기로 했다. 이 뼈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조차 못 하고서.


겨울이 오기 전에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마당도 있고 주변도 좀 한적한 곳으로 입양되길 바랐는데 헌터는 아직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임시보호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실 좀 걱정스럽다. 구조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평범한 개가 될 만큼만 잘 보살펴주다가 적당한 시기에 좋은 곳으로 입양되는 게 최선인데, 혹시라도 우리와 너무 오래 살게 되면 설령 입양이 된다 해도 새로운 곳에 다시 적응하는 게 어려워질까 봐...

그리고 한 편으론 아이도 걱정이다.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헌터와 헤어지기가 더 힘들 테니 말이다. 벌써부터 너무 정이 들고 예뻐서 자기가 입양하고 싶다고 하다가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걸 아니까 많이 속상해한다. 하지만 임시보호의 중요성에 공감해서 시작한 일이니 자신의 욕심은 버려야 한다고 다시 다짐했다가도 마음은 또 흔들리는 것 같다. 한국에서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어서 좋은 곳으로 입양되어서 잘 적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산책을 하다가 세 번 넘어졌다. 가을부터 끌고온 무지근한 감정들이 아직도 가끔 나를 건들었고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꼭 넘어졌다. 멀쩡하게 걷다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 앉는다. 그때마다 앞서 걷던 헌터는 어떻게 알았는지 뒤돌아서 내게로 다가온다. 헌터의 표정이 말한다. 괜찮아요?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물어봐 주었으면 했던 순간들이 헌터 뒤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금전까지 안 괜찮았던 나는 금세 괜찮아진다. 넘어진 내게 다가오던 헌터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실패'라 쓰고 '행복'이라 읽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