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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24. 2023

가끔, 해피 랜딩

Happy Landing Inn @ Carmel -by -the- Sea



미션 스트릿에 있는 킴의 갤러리를 찾아 막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시시한 내 글을 좋아하는 그녀 덕분에 맺어진 인연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알아보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벌리며 출입문 쪽으로 걸어왔다. 헐렁한 흰색 리넨 바지와 셔츠를 입은 그녀는 갤러리의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보다 훨씬 더 멋있고 숨길 수 없는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우리는 갤러리의 문을 닫고, 세 블록쯤 뒤에 있는 내 숙소로 가기 위해 '오션 에비뉴'를 걸었다. 초저녁인데도 거리에는 꽤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란스럽거나 들뜬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거리와 건물과 공기까지도 존중하는 느낌이랄까. 카멜에 대한 내 첫인상이 그랬다.



'해피 랜딩 인'의 '헤밍웨이' 방 입구



'킴'이 나를 위해 예약해 놓으신 숙소의 이름은 '해피 랜딩 인(Happy Landing Inn)'이었다.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의 결을 조용히 숨기고 있는 건물이 얼핏 청순해 보인 건, 정성껏 손질한 순면 식탁보 같은 아담한 정원 때문인 것 같았다. 관광객들로 술렁거리는 거리에서 그리 깊게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한갓졌다.


아늑한 가정집의 거실 같은 로비에는 사람은 없고, 연한 털빛을 가진 늙은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만 엎드려 있다가 킴을 보자 천천히 일어섰다.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는 걸 알 수 있었다. 킴이 개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는지 벽 뒤쪽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키가 크고 목소리가 조용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묘한 이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상냥하지만 오래된 고집스러움이 보였다. 능숙한 부드러움과 깔깔함을 마치 진자의 왕복 운동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시키는 걸 잊지 않았다. 직업적으로 몸에 밴 태도라기 보단 본능에 가까워 보였다. 놀랍게도 그녀와 '골든 리트리버'는 무척 닮은 색깔과 표정을 지니고 있었고, 전혀 놀랍지 않게도 골든 레트리버는 그녀의 개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올려두면 문 앞까지 아침 식사를 가져다줄게. 그리고 네 방은 '헤밍웨이'룸이야.


순간 나는 무안하게도 살짝 웃었던 것 같다. 내가 묵을 방의 이름을 듣는 순간, 우연이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짐을 풀기도 전에 '해피 랜딩'과 '헤밍웨이'라는 두 이름만으로 벌써 즐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해피 앤딩'일 수 없는 삶에서 가끔 찾아드는 사소한 '해피 랜딩'이 새삼 각별하게 느껴졌고, 헤밍웨이 룸 앞에는 내가 좋아하는 부겐빌레아가 피어있었다. 우연이 주는 즐거움은 계획된 즐거움보다 가뿐해서 좋다. 이 또한 여행이 묘미일 것이다.


다른 방의 문 위에도 팻발이 붙어있는 게 보여서 슬쩍 옆방으로 가봤더니 하얀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마릴린 몬로'방이었다. 정원을 바라보며 둥글게 놓여있는 일곱 개의 방이 이렇듯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유명한 이들의 이름으로 지어졌다는 걸 나중에 홈페이지를 보고 알았다.



'해피 랜딩 인'의 '헤밍웨이 룸'에 가방을 놓고 열쇠를 챙긴 후, 킴의 집으로 갔다. 허툰 구석이 한 군데도 없는 정갈한 집이었다. 만약 군더더기 장식을 완전히 없애고도 충만한 분위기를 내는 방법에 관한 실내 인테리어 잡지가 있다면, 6월호쯤에 실렸을 것 같은 집이었다.  

원래는 본채였지만 별채가 된 남편의 작업실도 인상적이었다. 작업실에 가로로 길게 놓여있는 오십 년쯤 되었다는 작업대에는 저절로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킵이 무릎 근처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요만한'어린 나무일 때 심었다는 대나무는 뒤꼍에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평소에는 거의 한식을 만들지 않는다는 그녀가 준비한 한식으로, 창가의 아름다운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렵거나 어색할까 봐 살짝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얘기들이 이어졌고, 후식으로 먹은, 지금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아이스크림도 맛있었다.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일어나셨다가 '아이스크림'이란 소리에 얼른 되돌아와 식탁에 앉으시던 킵의 모습에 함께 와르르 웃었다. 두 분의 조용하고 규칙적인 생활에 퐁당 떨어진 돌멩이처럼 잠깐이나마 일상의 리듬을 흐려놓았을 텐데도 유쾌하고 자상한 관심을 주셔서 마음이 편했다.


저녁을 먹고 집 근처에 있는 숲 속의 트레일로 들어가 그녀가 즐겨 걷는 산책 코스를 돌았다. 숲을 통과하고, 예전에 이곳의 시장이었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집을 흘깃 보고, 오래된 건물이 품위를 지키며 낮게 앉아있는 거리와 거의가 세컨하우스라서 빈집이 훨씬 더 많은 한적한 동네를 지나 바닷가에 다다랐을 때, 수평선으로 노을이 기울고 있었다. 꽤 오래 걸었다. 두런두런, 처음 만난 사람들답지 않게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새 길과 하늘과 바다가 경계를 지우며 캄캄해졌다. 몇 달 동안 너무 고단해서 눈까지 나빠진 데다 유난히 밤눈이 어두운 나는 순간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어서 걸음을 멈추고 셀폰을 꺼냈다. 그녀는 웃으며 내 팔짱을 끼고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 길은 내가 늘 산책하는 길이라 어디에 돌멩이가 있는지 까지도 다 아는 길이야. 그냥 걱정 말고 앞으로 계속 걷기만 하면 돼.


이상하게도 이 길을 속속들이 다 안다는, 그야말로 눈 감고도 갈 수 있다는 그녀의 말에서 나는 외로움이라고 하기엔 좀 격이 떨어져서 표정을 고치고 '고독'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그녀의 내면을 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진 않았다.


캄캄한 해변엔 군데군데 모닥불이 보였다. 법으로 금지해도 아직 저런다는 설명을 덧붙이셨다. 한쪽엔 제법 크고 많은 불들이 모여있었다. 누군가의 생일파티를 하는지 떠들썩했다. 그래, 위법이면 어때. 젊은 날 저런 맛도 모르고 지나온 나 같은 사람들만 억울하라지.


노란 표시, 그녀와 걸었던 저녁 산책길


거의 두 시간쯤 걸은 것 같다.

함께 내 숙소로 돌아와 정원의 벽난로 앞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 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는 걸 걱정하는 내게 그녀는 웃으며 또 말했다. 우리 동넨걸.


방에 놓여있는 쉐리주를 마실까 말까 망설이다 마시지 않았다. 만성이 된 피곤이 낯선 알코올을 핑계 대며 제멋대로 튀어나올까 봐 조금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침대도 푹신하고 방은 아늑했는데 깊은 잠을 자진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올리고 십 분쯤 후에 문을 여니 정갈하게 담긴 아침식사가 놓여있었다. 방에 있던 커피머신으로 뜨거운 커피를 큰 잔에 가득 내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오션 에비뉴를 걸어 내려가 이른 바다를 만났다. 그리고 두어 시간쯤 혼자 거리를 걸었다. 작은 도시는 많은 관광객들로 복작이는 것 같으면서도 아늑했지만 어제, 그녀와의 산책으로 이미 모든 건 충족된 듯 새로운 감흥은 없었다. 어쩌면 도시 여행은 새롭게 만나는 건물이나 거리, 음식보다도 그곳에서 만난 누군가에 의해서 더 충만해질 수도 있겠다.


점심은, 두 분의 단골이라는 자그마한 레스토랑에서, 희고 긴 앞치마를 두른 나이 든 웨이터의 능숙한 서비스를 받으며 먹었다. 나는 평소에 그녀가 즐겨 드시는 샐러드를 먹었는데, 야채도 아삭하고 소스도 특별히 맛있었지만 지금껏 그렇게 맛있게 잘 구운 치킨 브레스트를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버거를 절반으로 나눠 드시고 나머지 반은 싸서 갤러리를 지키고 계시던 남편에게 갖다 드렸다. 버거 반쪽을 아주 즐겁게 받으시며 고맙단 인사도 잊지 않으셨다. 백악관에도 가구가 들어간 적이 있을 만큼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셨던 '킵'은(KIpp Stewart) 94세의 연세로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날 저녁, 카멜을 떠났다.

언제든 쉬고 싶을 때 다시 오라는 말씀과 두 분과의 깊은 허그, 그지없이 다정했다. 그런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사랑스럽고 안온해서 두 번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그리고 그 예감대로 그 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 카멜에 가진 못했다. 때때로 삶은, 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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