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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25. 2023

여자의 눈물

하느님은 당신 아내의 눈물을 헤아리고 계신다.



어릴 때부터 아포리즘 형식의 글을 좋아했다. 짧은 문장 안에 핵심적이거나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을 만날 때면 짜릿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였는지 좀 성숙한 독서취향이 생기기 이전까지 여러 번 읽은 책 중의 하나가 탈무드였다. 탈무드에는 밑줄을 긋거나 노트에 옮겨 적다가 외워지기도 하는 좋아하는 글귀가 많았지만 경험과 연륜이라는 동행이 생긴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뜻을 이해하게 된 것들도 있다. 그중에 어떤 것은 단지 어른이 되어서라기보다, 여자라서, 아내라서 공감되는 문장이다.


하느님은 당신 아내의 눈물을 헤아리고 계신다.


아직 젊은 아내였을 때 남편에게 협박성 발언으로 두 번쯤 써먹었고 스무 번, 아니 이백 번쯤은 혼자 삭히며 하느님께 고자질을 했을 것이다.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지만 남이 보는데 선 거의 울지 않는다. 특히 가족들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꽤 애썼는데 오래전 어느 날, 나름대로의 이 규칙을 깨고 엉엉 운 적이 있다. 부엌의 전기스토브가 망가진 날이었다. 지금은 개스 스토브를 쓰지만 그때만 해도 코일로 된 전기스토브였고 가끔 전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으면 남편이 고치기도 했다.


사고를 치려고 그랬는데 시간이 빠듯할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곧 외출을 해야 하는 남편에게 괜히 스토브가 망가졌단 얘기를 했고, 다른 건 고쳐달라고 하면 잘도 미루면서 어쩐 일인지 바로 고치겠다며 뜯어보더니 선이 끊어져서 이으면 되는데 두 선을 연결한 부위에 씌우는 노란 안전캡이 찢어졌다면서 '언젠가' 세탁실 '어디선가' 본 그 손톱만 한 안전캡 하나를 찾겠다고 세탁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꽤 넓은 세탁실 한쪽은 갖가지 공구박스들과 운동기구가 놓여있었는데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서랍식으로 되어있는 공구 수납장을 열어보는 것이었다. 정리벽이 있는 내게 거긴, 그야말로 '카오스'였다. 그래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안다는 남편의 말을, 필요한 공구들은 공구서랍 어딘가에 다 있으니 시간을 좀 들여 찾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남편은, 무엇이든 사용 후에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 갖다 놓거나 '적재적소'라는 말을 실천하면 자신의 이미지에 흠이라도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탁실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갔다. 약속시간 때문에 마음이 급하니 손끝은 더 분주해져서 어질러놓는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보나 마나 찾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나중에 치우는 수고가 더 커질 것 같아서 나도 함께 안전캡을 찾으면서 동시에 어질러 놓은 물건들도 정리를 하자니 슬금슬금 화가 나려고 했다. 에잇, 혼자 찾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지! 홧김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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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아주 둔탁하고, 깊고, 기분 나쁜 소리가 내 머리의 숨골 어디선가 들려왔다. 순간 오른쪽 눈과 관자놀이가 쪼개지 듯 아팠다. 조금 돌출되어 있던 역기의 스테인리스 봉에 심하게 머리를 부딪친 거였다. 만화에서 갑자기 어딘가에 부딪쳐서 심하게 아플 때 왜 악!이라는 한 자로 표현하는지 비로소 알았다. 너무 아파 외마디 비명 외엔 신음조차도 더 나오지 않아서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있는데 남편은 들었는지 모르는지 계속 안전캡만 찾고 있었다. 그러더니, 드디어 찾았는지 잰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가면서 '조심하지!'라는 말을 먼지처럼 던져놓고 그냥 간다.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정말 아프기도 했지만, 다 크다 못해 이젠 늙어가는 어른이 어디 부딪쳐서 아프다고 이렇게 우는 건 내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울었다. 그 순간에도 내 이성은 알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울 일은 아니란 걸... 아마 초상집에서 망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제 설움에 겨워 크고 서럽게 우는 사람의 심정이 이랬을 것이다. 눈물이 끝도 없이 철철 쏟아졌다. 우니까 머리와 눈은 점점 더 아파왔다. 이렇게 내가 혼자서 눈물의 부루스를 추고 있는 동안 스토브를 다 고치고 다시 세탁실로 들어온 남편은,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란 듯이 말했다.


어? 정말 많이 아픈가 보네?


다 내 잘못이다. 그동안 내가 의지의 한국인인 척, 너무 독하게 참고 살았다. 힘들고 아파도 죽을힘을 다해 참는 동안 남편은, 견딜만하니 견디겠지, 로 자신을 세뇌시켰을 것이다. 뒤늦은, 그것도 아주 때 늦은 남편의 걱정과 위로가 모두 후환(?)이 두려운 아부처럼 보여서 더 울었다.


어디야? 여기? 야~ 부었다, 야! 되게 아팠겠다! 어?


찔찔 울면서도 매몰차게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소파에 가서 누웠는데도 늦게 오는 묵직한 통증이, 평소에 살살 달래며 살고 있는 내 취약지구인 어깨와 손목까지 감전된 듯 찌릿찌릿 전해왔다. 가끔 찾아오는 이런 종류의 통증은 끝장을 볼 것처럼 고단했던 날들을 떠오르게 하고, 그래서 정작 아픔보다는 그 기억 때문에 서러워지기도 하는,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좀 유치하게 우려먹을만한 육체노동의 과거가 있는 사람이다.


찬물을 한 컵 가져와서 마시라고 하는데도 끝까지 마시지 않고 버텼다. 웃음을 참고 억지로 심각한 표정을 만들고 있는 티가 역력한 이 남자는 얄밉게도 벌써 알고 있다. 내가 이젠 아픈 것보다 묵은 서러움에 울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는, 서러움은 스스로 알아서 다독거려야 하는 감정이므로 신체적으로 큰 탈이 난 게 아니라면 자신은 끝까지 무죄라고 주장할 것이다.

눈치를 보면서도 약속이 있었던 남편은 예정대로 외출을 하고, 내 울음소리에 처음엔 깜짝 놀랐던 아이들도 분위기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걸 감지했는지 머리맡을 오가며 몇 번 만져주더니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혼자 누워서 케케묵은 시시한 원망들을 죄다 불러 모아 눈물의 시중을 들게 하다가 탈무드의 글귀를 떠올렸고,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12살 무렵이니까 엄마는 아직 30대 중반이었을 때다.

 

그 해 김장 하던 날은 몹시 추웠다. 마당에서 배추를 씻던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속에 손을 묻으며, 손이 시리다고 우셨다. 나는 그때 방 안에서 조그만 손절구로 마늘을 빻고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분량의 마늘을 나 혼자 다 빻으라고 한 엄마가 야속해서 입이 삐쭉 나와 있었다. 그래서 손을 녹이며 우는 엄마를 보면서도 위로는커녕, 무슨 어른이 손이 시리다고 다 우는지, 암튼 우리 엄마의 엄살은 정말 못 말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백하자면 내 기준에서 엄마는 늘 어른답지 못했고 뭔가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해서 어린 자식들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혹이 난 머리를 문지르다 비로소 그때의 엄마의 눈물을 이해하게 되었다.


젊고 예쁜 양재학원 선생이었던 엄마, 가슴속엔 아직도 나만을 위해 하고 싶은 것들이 울렁증처럼 남아있는데 날마다 집안일과 육아로 몸은 고달프고, 게다가 엄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와 빈틈없고 책임감은 강하지만 자주 '남의 편'같은 남편에 대한 서운함 같은 것이 잠복해 있다가 단순한 신체적 고통을 핑계 삼아 몰려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찬물에 배추를 씻다가, 어린 딸 앞에서 흑흑 울만큼 손이 시렸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시리고 아팠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아내의 눈물을 헤아리고 계신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여자들의 입지가 달라졌다고 해도, 이 말속에는 여자라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농축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 구조가 다르듯 눈물의 입자도 다르다. 물론 습관적으로 혹은, 이기적인 이유로 지어 짜는 눈물은 제외다. 여자는 모든 것이 안에서 이루어진다. 생리와 임신과 출산이라는, 남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극한적인 것들을 경험한다. 이것만으로도 개인적인 성향이나 의지와는 상관없는 남녀 간의 심리적 차이는 분명해진다.


그래서 아내의 눈물은 단지 눈물이 아니다. 어디가 아파서 울든,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울든, 식구 중 누군가 서운하게 해서 울든, 저녁밥을 하려고 쌀을 씻다가 울컥 하든, 모든 눈물이 그리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약해 보일까 봐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이 심정을 아냐며 억울해할 남자들도 있겠지만, 참을 수 있을 만큼 울고 싶은 것과 본능적으로, 숙명적으로, 수만 가지 이유로 가득 차 있던 눈물이 끝내 넘치고 마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남편들이여, 기억하시라. 하느님은 당신 아내의 눈물을 헤아리고 계신다는 걸. 아무리 그래도 나는 좀 억울하단 생각이 드는 남자들은 다음 생에선 여자로아니, 아내로 태어나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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