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풍등 _ 감자에 관한 기억들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심었던 소나무들은 이젠 숲을 이루며 산책을 하거나 조용히 앉아있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늘을 나눠준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송림과 좁은 해안도로를 사이에 든 또 다른 송림에 들면, 고작 그만큼의 거리로도 공기의 입자가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풍경은 비슷해 보여도 바닷가쪽의 송림보다 훨씬 더 깊은 숲의 느낌이 난다.
시들어 떨어진 솔잎이 쌓여 늘 붉어보이던 숲길에도 여름이 다가올 수록 점점 더 초록이 넓어진다. 하지만 햇볕이 잘 들지 않아선지 꽃은 거의 없다. 드문드문 피어난 쑥부쟁이가 반가울 정도다. 갯완두의 보랏빛, 갯메꽃의 연한 분홍으로 시작해 노란꽃이 많은 해변의 야생화를 떠올리면 지척의 거리인데도 사뭇 다르다. 이쪽 송림은 묵묵하다. 그런데 어느 날, 꽤 크고 흰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늘 속을 비추는 햇살처럼 환하고 예뻤지만 의외기도 했다. 보자마자 바로 감자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얕은 상식으로도 감자는 씨감자를 쪼개서 심는다는 걸 알았기에 이렇게 야생에서 감자가 자란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이미 '감자꽃을 보았네'가 입력되었다. 하지만 미심쩍은 건 발설하기 전에 확인을 해야지.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내가 본 것과 조금 다른 듯 하면서도 감자꽃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식물을 분별할 때, 꽃이 비슷하면 잎으로 구분해야 된다는 걸 들은 적이 있어서 잎을 유심히 살펴봤지만 어떤 사진에선 똑같아 보이기도 했다. 의심을하면서도 무의식에서 감자꽃이라는 확신이 더 컸었는지 그냥 감자꽃이라 생각하며 잊었는데 우연히 내가 찍은 사진을 본 시골사는 지인이, 잎을 보니 감자가 아니라고 했다.
이번엔 검색창에 '감자꽃'대신 '감자꽃과 비슷한 꽃'으로 쓴다. 어렵지 않게 '배풍등'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발견했다. 종류도 몇 가지 되는데 그중에 내가 본 모양이 있었다. 가짓과였다. 그러고 보니 잎과 줄기가 가지와 비슷하다. 가을에 빨간 열매가 맺히는데 이 열매를 좋아하는 새들이 퍼트린다고 한다. 숲에는 늘 새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저절로 연결이 된다. 생각이 게을렀다. 문득, 첫인상이나 느낌이 비슷하다고 내 안에 이미 입력되어있는 정보의 틀에 가두어 사물이나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실수와 실례를 범하게 하는 지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감자꽃은 아니었지만 배풍등은 나에게 감자에 얽힌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여름이면 강릉의 해수욕장이나 시장 곳곳, 심지어 동네 슈퍼마켓 한쪽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었다. 물이 조금씩 나오는 호수를 대 놓은 커다랗고 뻘건 고무 대야엔 맑은 물이 철철 넘치고 그 속엔 뽀얀 속살을 드러낸 깍은 감자가 한가득 담겨 있다. 손님이 오면 즉석에서 감자 한 알을 건져 강판에 슥슥 갈아서 전을 부쳐서 팔았다. 그때 우리는 감자전이 아니라 '감자적'이라고 불렀다. 강원도식 감자전은, 다른 재료는 전혀 넣지 않아 순정하고 고집스럽다. 대신 부추와 고추, 참기름, 깨 등을 넣은 양념간장에 찍어 먹는다. 밀가루를 전혀 넣지 않고 강판에 간 감자만으로 만든 감자적은 혀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지 않고 약간 깔깔하다. 감자보다 고구마를 더 좋아하고, 그 깔깔한 촉감이 싫어서 어릴 땐 그리 즐기지도 않았던 감자적인데도 이렇게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어쩌면 감자적이 아니라 그때의 풍경과 냄새와 서툴지만 당당했던 어린 마음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자적을 즐기진 않았지만 평소에 자주 감자 반찬을 먹고 햇감자를 쪄서 열무김치와 함께 먹는 걸 별미로 치면서도 중학생이 될 때까지 감자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마치 땅심이 품고 있는 감자알이 감자의 전부인 양 잎이나 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고, 감자도 꽃이 핀다는 것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주말에. 자취를 하던 친구는 본가에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엄마가 오늘 맛있는 것 해 줄테니 친한 친구들을 데려오라고 했다면서. 나와 두 명의 친구는 그녀를 따라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리자 친구는 꽤 큰 집을 가르키며 저기가 자기집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 집을 빤히 보면서도 밭둑을 한참 걸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짙푸르고 너른 밭에 하얀 꽃이 가득했다. "무슨 꽃이야? 너무 예쁘다." 그녀는 감탄하는 나를 이상하단 표정으로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감자꽃이잖아."
친구는 나를 놀렸다.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감자바위가 감자꽃을 처음 보냐고. 더구나 저 꽃이 뭐가 예쁘냐고. 나도 이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꽃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구마처럼 달콤하지도 않고,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툭하면 가난과 설움의 소품으로 등장하고, 류시화의 '감자에게'란 시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을 떠올려도 비슷한 이미지다. 게다가 나는 감자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콩보다는 팥, 감자보다는 고구마가 변하지 않는 내 식성이다. 이런 알감자와 비슷한 이미지의 감자꽃인데도 마음이 끌렸다.
뭉근한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사는 동안 감자에 관한 상황과 은유가 쌓이면서 첫인상도 함께 견고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 내가 보기에만 좋은 화초보다는 먹을 수 있는 푸성귀와 그 꽃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나니 그 날의 감자꽃은 나도 미처 몰랐던 내 취향이 보낸 신호였을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꽃집이나 꽃밭에 피어있는 꽃들은 '살아있는' 것들이지만 밭에 있는 야채와 알뿌리 식물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무의식 속에 '식량'을 공급해 준다는 원시적인 경외심이 남아있어선지도 모르지만 밭에 있는 것들, 들판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것들이 더 기특하고 예쁘다.
그녀는 강릉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학교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감나무가 유난히 많았던 학교 옆 작은 마을의 두 번째 집의 문간방에서 살았다. 혼자 잠자고 혼자 밥을 하고 도시락까지 싸 오던 그녀는, 어느 날 놀러 간 내게 군것질거리가 아닌 밥을 해 주었다. 그때 친구가 만든 반찬이 감자를 둥글고 얇게 썰어서 간장과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 감자조림이었다. 나는 고춧가루가 들어간 감자조림은 그때 처음 먹었다.
감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른이 된 후엔 자주 감자 반찬을 했다. 감자를 좋아하는 남자와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감자와 당근을 얇게 채 썰어서 얼음 물에 담갔다가 건져서 물기를 닦고 올리브오일과 구운 소금과 후추만을 넣어서 하얗고 아삭하게 볶았다. 하지만 가끔은 그날 그녀가 내게 해 주었던 감자조림을 떠올리며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녀가 만들었던 감자조림의 조리법이나 맛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니 아마 나는 나만의 레시피로 감자조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간장과 고춧가루를 넣어 조리는 감자 반찬을 만들 때면 늘 그녀가 떠오른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타인은 모르는 자기만의 조리법으로 차려지는 밥상과 같다. 그래서 타인의 입맛에 맞기는 어렵고, 그래서 또 우리는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날 나는, 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낮은 부엌에서 우리 엄마도 만들어 준 적이 없는 반찬을 만드는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부쩍 어른스러워 보이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 혹은 슬픔을 느꼈다. 그때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저 막연하게 어른스럽다는 건 외로움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던것도 같다.
세월의 문을 하나씩 통과하는 동안 어른스러워서 외로운 시기를 지나고 선택적 외로움을 삶의 무늬로 고르면서 외로움과 고독을 분별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꽉 움켜쥔 감자만큼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