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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Nov 11. 2023

샛길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옛말이 있다. 야단까진 아니더라도 부드러운 경고쯤으로 듣게 되는 말이다. 하던 대로 계속하면 될 텐데 괜한 짓을 해서 일을 망치거나 지연시켰다는 뜻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확하게 삼천포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몰랐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것이 남해 연안의 한 아름다운 고장의 이름이란 것을 알았다.


이 문장에 사용된 '삼천포'의 유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여러 가지의 '설'이 있는데 대개가 지리적인 특성 때문인 듯하다. 예를 들면 '진주 같은 큰 고장으로 장사를 가던 중인데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 삼천포로 빠져서 장사를 망쳤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어느 드라마에서,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삼천포에 사시는 분들이 항의를 했다고 한다. 뭐 그런 일로 항의까지 할까 싶다가도 만약 내가 삼천포에 살았다면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 같긴 하다.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이 부정의 의미로 계속 언급되면 누가 좋겠는가.


현재 삼천포의 정식 지명은 근방의 사천군과 합쳐서 사천시로 불린다. 어느 시인께서는, 그 아름다운 삼천포라는 이름을 사천으로 바꾸어서 무슨 짜장면 집 같다고 애석해하셨다. 삼천포가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 해 본 적은 없으면서도 시인의 말씀에는 공감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저 말에 다른 의미를 붙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삼천포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려던 길을 멈추고 샛길로 빠진 것인지도 모른단 상상까지 한다. 아마도 몇 년 전에 한국에 갔다가 남해에서 여러날 머물기도 했고, 박완서의 단편소설, '그리움을 위하여'를 읽은 후, 거기에 나오는 아름답고 따사로운 사량도가 삼천포에서 빤히 보이는 섬이라는 걸 안 후인 것 같다. 막연하게 지명으로만 알고만 있던 곳을 직접 가서 바라보고, 걷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곳은 이전에 내가 알던 곳과는 다른 곳이 된다. 그러다 보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있던 허물도 지워주고 싶어진다.


삼십대까지도, 세상이 정석이라 정해놓은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옳고,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며 의심없이 살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내가 주장하던 옳고 그름의 기준이 의미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처음엔 갈등하고 낙망했지만 미처 몰랐을 뿐이지 그 길 또한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걸 나중에 깨닫기도 한다. 흔히 '다르다'로 표현해야 하는 것에 '틀리다'라고 말하고, 듣는 사람도 거부감 없이 알아듣는 것처럼,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여러번 '다름'을 '틀림'이라 단정지으며 살아왔다는 걸 깨닫는다. 이렇게 기습적으로 부피를 늘리는 부끄러움은 후회를 동반하지만, 더 늦지 않았음이 다행이기도 하다.


이젠 큰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샛길의 유혹에 넘어가서든,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궤도수정이 필요해서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길로 가고 있다 해도 지레 걱정하고 낙담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길에든 그 길만의 풍경이 있고, 내 마음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미처 알지 못했던 나와 세상을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내가 살아온 삶이란 얼마나 책임 투성이고 단조로왔던가! 길을 가다 삼천포가 보이면 나는 그 길로 빠져나갈 것이다. 삼천포의 끝에 무엇인가 꼭 있을 필요는 없다. 그 길은 책임이나 의무로 걸어야 하는 큰길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샛길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한 문장에 이런저런 생각을 얹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곽재구의 여행수필집에 인용된 백석 '삼천포'란 아름다운 시가 떠올라 일부러 찾아본다. 책 속의 샛길에서 오래된 말로 지어진 맞춤한 詩, 하나 다시 만난다.



졸래졸래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러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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