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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16. 2024

 단편소설 _ 시선 _ 1/2


 카페의 출입문을 열 때마다 마치 고질적인 통증처럼 그가 떠올랐다. 실제로 등 쪽 어딘가로 예리한 금 하나가 지나갔고, 때론 헉, 소리를 삼킬 만큼 아팠다. 아무런 저항 없이 날마다 반복되는 그녀의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당황스러운 통증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은 지 4개월째다.


이별을 인정하고 감정이 희석되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부재가 엷어질수록 통증은 더 둔탁해졌고, 그러면서도 가끔 생각나는 그와의 마지막 며칠이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

 벌써 며칠째, 그는 사포로 벽을 문질러 고르게 만드는 작업만 하는 중이다. 마치 이 세상에서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는 사람 같다, 그녀는, 그러다간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지쳐 쓰러지거나 벽이 다 닳아 없어지고 말거라며 농담만이 아닌 불평을 했지만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하던 일만 계속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짧게 미소 지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주, 그의 등이나 뒤통수는 말이나 표정보다 더 정확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예정대로라면 일주일쯤 전에 모든 작업이 끝났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그의 작업 속도를 지켜보는 동안, 이미 그냥 두기로 결정한 블라인드를 새것으로 바꿀까 말까, 쓸데없는 고민을 수십 번쯤 했다. 창문 아래엔, 며칠 동안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원목 테이블과 의자가 아직 포장도 풀지 못한 채 쌓여있었다. 박스 위로 횟가루가 뽀얗게 앉아서 한 백 년쯤 거기 그렇게 엎어져 있는 것 같다. 문득 지금 자신의 모습도 저 박스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터무니없는 자괴감을 지우려는 듯 손바닥으로 거칠게 횟가루를 쓸어내린다. 연거푸 재채기가 났다. 그녀의 재채기 소리를 들은 그는 분진마스크를 벗으며 돌아섰다.


그러게 마스크를 하거나 밖에 나가 있으라니까.


마스크 하는 거 싫어. 숨쉬기 힘들어.


그럼 산책하고 와. 방에 들어가 있거나. 곧 끝날 거야.


 하지만 그녀는 그가 하라는 것 그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딱히 뭐라 설명할 수도 없는 감정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서 한 뼘만 더 자라면 아무리 무딘 것에 닿아도 바로 터질 것만 같았다.


 무슨, 가장 반듯한 벽을 뽑는 대회라도 있는 거야? 그 정성이면 집도 한 채 지었겠네.


 그는 대답대신 웃으며 한쪽 장갑만 벗고 크리넥스 박스를 가져다주었다.


 난 이렇게 통째로 주는 거 싫다니까.


 그는 ‘또 그 소리 한다,’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크리넥스를 뽑아주진 않았다. 네가 몇 장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박스로 주는 거라던 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면서도 그녀는 크리넥스를 통째로 주는 게 너무 싫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진 않지만 꽤 자상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크리넥스 통에서 휴지를 뽑아주지 않는 행동이 마치 사랑의 척도인양 매번 마음이 상했다.


 코 푸는 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말울음 소리를 내며 코를 푸는 그녀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몇 번 헝클어 놓고 그는 진공청소기를 켰다. 그녀는 휴지를 여러 장 뽑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 동안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고 쾌청한 날이었지만 공기는 아직 찼다. 그가 작업을 끝낼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에 없이 조바심이 났다. 이 조바심의 정체가 끊임없이 미세한 횟가루를 날리며 개업 날짜를 지연시키는 저 벽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했다. 이럴 땐 너무 예민한 촉수를 지닌 자신이 지겨웠다. 무엇이든 닥칠 때까지 좀 무디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다. 특히 그에 관해서라며 더욱 그랬다. 아마 그는 지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거나 아니면 이미 끝낸 생각을 언제 어떻게 행동에 옮길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몇 번 재채기를 더하고 코를 풀고 나니 콧속이 아렸다. 그녀는 먼지 종류에 알러지가 심한 편이다. 어쩌면 무조건 이해하고 기다려주던 평소와는 다르게 그에게 짜증을 내는 이유가 알러지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선명한 이유도 짚어내지 못한 채 평정심을 잃어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바람속에서 물냄새가 났다. 곧 우기가 시작되려나 보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부쩍 말수가 줄어든 그가 좀 달라졌다고 느끼면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신의 예감을 그를 통해 확인하는 순간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런 묵인이 두 사람의 관계에 틈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지쳤어. 무의식처럼 떠오른 ‘지쳤다’는 표현에 그녀는 흠칫 놀란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 마시자.


 너무나 일상적이고 다정한 그의 말투는 그녀가 마음속에 눌러둔 말들과 부딪치며 마치 횟가루 한 줌을 강제로 삼킨 것처럼 목을 메이게 했다. 어쩌면 달아나는 중인 건 그가 아니라 그녀인지도 모른다.

 

 그가 여전히 벽과 싸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사포질을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모카 포트로 끓인 에스프레소를 큰 머그 두 개에 나누어 담고 끓는 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의 잔에는 각설탕을 두 개 넣는다. 이건 커피가 아니라 까만 설탕물이라고 놀려도 고쳐지지 않는 그의 습관이다. 혹시 미카가 커피를 이렇게 마셨을까? 아무런 호기심도 없이 잠재웠던 그의 옛 여자가 요즘 들어 예고도 없이 불쑥 돋아나 그녀를 유치하고 불손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머리칼 위로 떨어진 작은 풀잎을 털어내 듯 가볍게 머리를 흔든다. 어느새 그는 작업을 멈추고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임시로 놓아둔 작고 둥근 사이드테이블에 커피 잔을 내려놓고 돌아선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그녀와는 달리 그는 늘 조금 식은 후에야 마셨다. 주방에 두고 온 자신의 커피가 있는 곳으로 가던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너의 뒤통수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며 놀리던 게 거짓말 같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거짓말을 숨기려는 사람처럼 조금 잰걸음으로 창 쪽으로 가서 뒤에서 그를 안으며 등에 얼굴을 묻었다. 심한 체증처럼 불편하고 괜히 서운하던 마음과는 달리 몸은 금세 평온해진다. 늘 그랬듯이 그의 등은 따뜻하고 편했다. 너무나 익숙해서 마치 분리되었던 자신의 일부와 비로소 합체가 된 것 같다. 그가 자신의 가슴을 안고 있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순간, 그녀는 울컥한다. 그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의 촉감은 매번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치 자신의 몸에서 손을 떼어내어 그에게 준 사람처럼 무심해진다. 습관적인 체념이다.


 지난 삼 년 동안 매번, 한 번도 어김없이, 그 차가운 타이타늄 실버의 가늘면서도 묘하게 도톰하고 견고한 촉감은 그녀에게 표현하기 힘든 감정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영혼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그 반지에 긁힌 상처가 있다. 간신히 아물어서 희미한 흉터가 되었나 싶으면 또 새로운 생채기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고, 그는 단 일초도 그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딱 한 번, 속으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처럼 떨면서도, 겉으로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를 쓰며 물어본 적이 있었다. 샤워할 때나 잘 때도 끼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

 나와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빼놓으면 안 되겠냐는,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내 속으로 삼켰다.


십 년 넘게 끼고 있던 거라서 잘 빠지지도 않을 거야.


그는 별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지만 그녀에겐, 이 반지는 내 몸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날 이후 그녀는 반지에 대한 언급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건, 그의 결혼반지였다.



2

올해로 미카가 죽은 지 사 년이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 사고에 대해 물었던 것을 후회한다. 막연한 연민으로 안쓰러웠던 마음이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얼마나 무거운 감정이 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건 말의 무게인지도 모른다.


 사고 당시 그가 운전을 했다. 에드먼튼에서 밴쿠버로 넘어오는 중이었는데 어둡고 긴 밤길이라 깜빡 조는 동안 차선을 넘었다. 반대 차선에서 오던 대형 트럭의 크락션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리고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으며 피했지만 미처 제어를 하지 못하고 길 옆의 내리막으로 차가 밀렸다.

차는 농가의 헛간 앞에 있던, 큰 버드나무에 조수석이 박히면서 섰다. 미카는 구조대가 왔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그는 두 달 동안 병원에 있었다. 치료가 끝난 후 의사는 정신과 상담을 권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신체적인 치료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는 오히려 죄책감을 상승시킬 뿐이었다. 미카가 그리웠고 미안했고 고통스러웠다.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 순간에, 자신의 잘못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 미카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고통이라도 끌어안고 있어야 죄책감이 덜했다. 그는 숨 쉬는 횟수만큼 후회했다. 너무 피곤해서 중간에 운전을 교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으니 다음날 아침에 떠나자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퇴원 후에도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기만 하다가 어느 날, 누군가 등을 떠민 것처럼 집을 나와서 밴프와 쟈스퍼를 오가며 로키산맥을 돌아다녔다. 그림은 그릴 수도 없었다. 수강생이 꽤 있었던 화실도 문을 닫았다. 대신 마루를 놓거나 집에 페인트를 칠하고 담장을 고치는 일 등을 했다. 몸이 견디기 힘들 만큼 지쳐야만 겨우 몇 시간이나마 잠을 잘 수 있었다.

 이렇게 지낸 지 일 년쯤 지났을 때, 광역 밴쿠버의 한 도시인 ‘포트 무디’에 사는 친구로부터,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한 달 정도 빅토리아에 가야 하는데 내려와서 작업도 하고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대신 수업을 해 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밴쿠버로 가려면 사고가 났던 곳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림을 안 그린 지 오래되어서 도움이 못 될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수강생들에게 한 달치 수업료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 수업을 취소하려면 환불을 해줘야 하지만 알다시피 가난한 화가라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들으며 마지못해 허락을 하고 말았다. 사고 직후 병원에 있는 동안 가장 여러 번 병원을 찾아온 친구라서 고마운 마음에라도 끝내 거절할 수는 없었다.


포트 무디는 작은 도시였지만 아마추어 화가까지 포함하면 백여 명의 화가들이 등록되어 있는 곳이라고 했다. 친구의 화실은 ‘로키 포인트’라는 이름의 작은 해안가 공원 근처의 낡은 목조 건물 안에 있었는데, 여섯 명의 화가들이 작은 작업실을 하나씩 쓰고, 협소하나마 전시공간도 있고 소박한 미술 재료상도 있었다. 매년 시에서 개최하는 아트 페스티벌의 갤러리 투어 코스 중 한 곳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런 분위기가 반가웠다.. 마치 늘 사용하다 잃어버린 만년필 같은 소지품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는 첫 일주일 동안은 화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며 지나왔지만 사고 지점을 통과한 자신이 마치 그녀만 그곳에 두고 혼자 빠져나온 것 같은 괜히 미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마다 전화를 해서 화실에서 큰 길만 건너면 바다와 숲이 있는 산책로가 있으니 꼭 가보라고 재촉하는 친구 때문에 결국은 화실을 나섰다. 숲길은 아름다웠고, 파도도 없는 호수 같은 바다인데도 가끔은 비릿한 짠내가 풍겼다. 친구가 독촉하듯 날마다 산책을 가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득, 어쩌면 그 녀석은 일부러 화실을 비우고 자신을 불러낸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숲길은 바다를 끼고 말밥굽 모양의 원을 그리며 이어져 있어서 화실에서 나와 왼쪽으로 들어선 그는 그게 공원으로 가는 길이란 것을 자전거 도로 옆의 숲길을 한참 걸은 후에야 알았다. 피크닉 테이블이 서너 개 놓여있는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멀리 바다를 향해 놓여있는 긴 피어가 보였다.


 피어의 가운데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나무 벤치가 있었는데 두 개씩 서로 등을 맞대고 놓여있었다. 모두가 누군가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기증한 것들이다. 그는 그 벤치에는 앉을 수가 없었다. 산 자와 죽은 자, 그들 사이의 교감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와서 편하게 쉬라는 마음으로 만들어 놓은 의자인 줄 알면서도 그랬다. 친구들이 미카가 자주 가던 공원에 벤치를 하나 기증하자고 했을 때도 그는 반대했다. 벤치를 놓고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아름다운 글을 새겨서 달고, 낯선 이들이 그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웃는 상상을 하면 마치 둘 사이에 타인이 끼어드는 것 같았고, 미카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면 자신의 고통이 덜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는 한참 동안 피어 끝에 우두커니 서서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거기 어딘가쯤에서 미카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산속에서 태어나 산속에서 자란 미카는 눌 바다를 그리워했다. 문득, 제대로 뽑은 뜨거운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일주일 동안 화가들의 공용공간에 있는 커피메이커에 있는 커피를 마셨는데 최악의 맛이었다. 아무래도 커피를 사러 시내 쪽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피어를 벗어났다. 그런데 멀리, 아직 가보지 않은 길 쪽에 작은 간판이 달린 가게가 보였다. 간판의 글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커피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마음을 바꿔서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카페일지도 모른단 생각이든 게 이상할 정도로 허름한 가게였다. 위치가 공원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나 알아볼 법한 곳이기도 했지만 가게 외관도 장사를 잘해보겠다는 의지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다. 작은 타원형 나무판에, 손으로 직접 쓴 게 분명한  café Marronnier라는 간판이 바람이 부는 대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간판 속의 글자조차도 풍화작용이 진행되고 있어서 곧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카페였다. 실제로 몇 군데는 살짝 지워져 있었다.

 간판만큼 낡고 먼지 낀 다크 브라운의 출입문을 열자 단음의 종소리가 짧게 났다. 실내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아늑하고 무엇보다 커피 향이 좋았다. 그리 많지 않은 테이블에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가 어디에 앉을까 잠깐 망설이는데 주방과 분리하기 위해 쳐 둔 커튼을 열며 한 여자가 나왔다.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의 동양여자였다. 발랄한 20대 같기도 하고, 동안의 30대 중반 같기도 한 여자였다.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얗고 고른 치열이 인상적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딘가 익숙했다. 하지만 쉽게 인사를 나눌 수는 있지만 정말로 친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순식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당황스러웠다. 어정쩡하게 서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특별히 원하는 게 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지으며 어른 몸을 돌려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창가에 앉으니 조금 전 자기가 걸어온 길과 피어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창문 가까이에 오래된 마로니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뭘 드실래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이상하게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깨달았다. 무엇인가 오래 미뤄두었던 것이 있다면 지금이 그걸 할 가장 적절한 시간이란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주세요.


 다음 날 늦은 아침, 그는 다시 그 카페로 갔고, 그녀가 만든 에그 베네딕트가 너무나 부드럽고 맛있어서 엄청나게 긴 시간 한 뭉텅이를 건너뛴 기분이었다. 그는 거의 날마다 카페로 갔다. 어느 날 한 손님에게 능숙하게 한국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그녀가 한국인이란 걸 확인했고, 처음으로 한국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그날부터는 될 수 있으면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 주문을 했다. 처음으로 한국말을 했을 때,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국분이셨구나..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


어떤 날은 제법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대개는 별말 없이 앉아 실내를 돌아다니는 옛 노래들을 들으며 손님이 많지 않아 바쁘진 않았지만 혼자 주방과 홀을 잰걸음으로 오가는 그녀를 몰래 바라보기도 했다.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화실로 돌아오는 내내 마치 동행처럼 따라오던 날, 오랜만에 스케치를 했고 그날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달이면 돌아온다던 그의 친구는 다시 한 달을 더 부탁했다. 그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주 카페에 오는 단골이 되었고 그녀가 한가할 때면 한국말과 영어가 섞인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느 날, 마지막 청소와 정리를 끝내고 오픈 사인을 돌려놓다가 문밖에 서있는 그를 보고 그녀는 조금 놀라면서도 문을 열었다.


막 문을 닫으려던 참인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저, 이틀 후에 떠나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천천히 마저 열고 그에게 들어오라는 고갯짓을 했다. 가랑비가 오는지 그의 머리칼과 어깨가 살짝 젖어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진한 히아신스 향기가 났다. 밤공기는 아직 축축하고 묵직했지만 한 겨울의 그것은 아니었다. 문을 닫으며 그녀가 말했다. 곧 봄이 오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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