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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17. 2024

노란문

단편소설 _ 시선 _ 2/2



3

 원래는 벽을 다 고르고 나면 벽화를 그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얗고 고르게 완성된 벽 앞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그를 보면서 그녀는 망설였다. 카페의 새 벽에 그의 그림이 그려지는 걸 원했던가, 아니면 벽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당연히 그가 그려야 한다는 일종의 예의 같은 것이었을까. 그는 늘 사람만 그렸다. 그리고 그림 속의 남자와 여자는 늘 쓸쓸하고 어두웠고 뭔가 집요했다.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도 도달할 수 없는 한 지점을 보는 기분이 들어서 힘들었다. 빈 벽 앞에서 화구통을 뒤적이다 멍하니 앉아있는 그의 망설임 또한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결국 누구나 공감하고 카페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해 줄 종류의 그림을 원했던 그녀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그의 그림은 변함없을 것이고 그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그의 그림이 점령한 저 희고 반듯한 벽을 상상하자 숨이 막혀왔다. 어쩌면 좋아하지도 않는 명화의 모사를 분위기 운운하며 원했던 이유가 단지 그의 그림이 그려지는 걸 막기 위한 구체적인 핑계였을지도 모르고, 정작 원한 건 그저 희디흰,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빈 벽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대로 두자.


그가 힐긋 그녀를 뒤돌아보며 묻는다.


왜?


그냥... 갑자기 저 고르고 흰 벽이 좋아졌어. 다른 색을 칠하든 액자를 걸든 천천히 생각할래. 벽화는 아닌 거 같아. 자기도 원래 그런 그림 안 그리잖아. 사실은 나도 좋아하지 않아. 미안.


그래? 니 생각이 그러면 뭐..


그는 화구통 옆에 펼쳐놓았던 화집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일어섰다. 두 페이지가 연결되어 있는 그림은, 르느와르의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이었다.


 두 말 없이 일어서는 그를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결정에 더욱 확신이 갔다. 자신이 명화의 모사를 원했던 건, 지난 3년 동안 이 공간 안에 붙박이 가구처럼 고여 있는 애증의 자국들을 지워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란 걸 알아챘다. 그가 그림 속에 숨겨두는 추억과 고통과 그리움을 더는 눈치채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스며들 여지가 없는 명화의 모사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저 빈 벽에 마음이 끌렸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까지 오직 그의 기준으로 선택했고,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를 통과하지 않은 것들은 무의미하다 여기는 동안, 어쩌면 그녀는 홀로였을 때보다 더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끊어도 오직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그녀의 생각이 변한 건 아니지만 혹시 그게 오기 같은 건 아니었을까.. 사랑과 혼동되는 소유욕은 아닐까... 부쩍 자기 검열이 심한 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오래 묵은 무엇인가가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누구를 더 사랑할까.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안정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안정감속에는 한 사람이 더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랑의 균형과 무조건적인 신뢰와 일상의 사소한 동의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느낀 것이 이 안정감이었다. 그는 ‘너를 위해서’ 혹은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녀에게 강요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예의는 어떤 결정을 할 때 구체적인 언어가 필요하지 않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서 알았다. 무언의 동의는 함께 하는 시간을 고요한 강물처럼 흘러가게 했고 그녀는 그 안정감에 감탄했다. 하지만 그 감탄이 조금씩 탄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신호는, 그가 그녀가 했던 기발한 표현이나 의미 있는 말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이 말한 걸로 착각하며 오히려 그녀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듯 말하는 게 반복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자신이 둘만의 미래에 대해 터무니없이 긍정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시작부터 두 사람은 다른 지점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자신은 당연히 ‘해피 엔딩’이리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는 단지 일시적인 '해피 랜딩’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녀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과연 동화나 영화 속이 아닌 현실에서 '해피 앤딩'은 가능한가? 어쩌면 자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탐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자꾸, 끝없이, 쓸쓸했다.


 그는 일 년에 두세 번씩 에드먼튼에 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의 행선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가, 당연한 일로 여겼으므로 그녀도 마치 진자의 움직임처럼 일정한 속도와 간격으로 그냥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이 철저하게 분리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며칠 만에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두세 달이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고 그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적당한 간섭이나 강요가 없는 관계 또한 견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세 살 때 입양이 되었다. 한국에서 그를 데려온 양부모님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키웠지만 뒤늦게 아이가 생겼다. 그렇다고 그를 대하는 태도나 마음이 변한 건 아닌데도 아이를 낳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을 입양했다는 걸 알고 있는 예민한 그는 스스로 만든 상처로 힘든 사춘기를 보냈다. 하이스쿨 때부터는 '팀 호튼'에서 알바를 하며 독립한 그는 양부모님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미카의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미카는 어릴 때 부터 한 동네에서 자랐고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다. 미카의 집에 가면 식구들 모두 자신과 같은 색의 머리칼과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늘 그를 반기며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그가 경험하지 못한 한국에 대한 것들을 말해주곤 했다. 그들은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결혼했고, 첫사랑과의 결혼이라니 이렇게 재미없는 인생이 어디있냐고 놀리면서도 덩달아 행복해하는 친구들과 가족의 축복속에서 결혼을 했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둘만의 세계라서 특별한 시간들로 지어진 모나지 않은 삶이 그들 편이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고가 나기 전까지.


 그녀는 그가 에드먼튼에 가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물어보지 않는 건 간신히 지키고 있는 자존감이라 여겼다. 하지만 내 의견은 전혀 들어설 자리가 없는 사실에 동조하고 이해하는 척한다는 것은 어차피 질 수밖에 없는 경기에 나가야 하는 격투기 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녀가 손끝 하나 마음 한쪽 건드릴 수 없는, 그의 죄책감이라는 갑옷을 입은 존재가 아닌가. 그럴 때면 차라리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세상의 길이 다 사라져서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하길 바랐다. 아니다. 이건 진심이 아니다. 그녀는 늘,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답을 알면서도 오답을 쓸 수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모든 것에, 고통에 까지도 익숙해지는 자신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가 에드먼튼으로 갈 때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쩌면 그에게는 여전히 추억 속의 그 장소가 집이고 자신이 있는 곳이 여행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 수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겐 이런 심정을 하소연할만한 사람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동조하듯 그의 부재는 점점 길어졌다. 실내 장식을 고치는 공사를 맡아서, 혹은 그곳 갤러리에 상설 전시될 그림을 그려주느라.. 등등의 적절한 이유를 말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는 대신 그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를 조금씩 헐어버리는 건 그의 행동이 아니라 그녀 자신인지도 몰랐다.


벽화를 그리지 않기로 결정하자 그는 바로 출입문에 칠할 색깔을 고르기 위해 페인트 통을 몇 개 가져다 놓고 조금씩 섞어서 여러 가지 색을 만들어 문에 묻힌 후, 뒤로 물러서서 비교하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노랑이 낫겠다. 이걸로 하자!


저녁을 먹는 내내 둘은 별 말이 없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숱하게 나누던 그 시시하고 유치하지만 즐거웠던 대화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식사 속도가 느린 편인 그의  스파게티 접시가 비워질 때까지도 그녀는 새우와 조갯살을 몇 개 찍어먹은 후 내내 포크에 면을 감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스파게티를 포크에 말아서 입안에 넣는 일이 그렇게 고단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접시에서 입까지의 거리가 천리만리였다. 그는 말했다.


이번엔 좀 오래 걸릴 거야.


알아, 벌써 말했잖아.


그리고.. 하루 일찍, 내일 떠나려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설거지도 미루고 소파에 주저앉아 묽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 그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문을 칠하기 시작했다. 문 정도는 그녀가 칠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집을, 아니 이 공간을 떠나기 직전까지 무엇인가를 하는 편이 훨씬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문의 바깥쪽을 다 칠하고 안쪽을 칠하기 시작했을 때, 후각을 자극하는 희미한 페인트 냄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르르 소파에 누웠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졸렸다. 마치 소복하게 쌓아두었던 자잘한 꽃잎들이 휙 불어온 바람에 허물어지며 날리는 것처럼 몸이 풀렸다.


안으로 들어가서 자.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평소 같으면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그가 담요를 덮어주거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도와주기를 은근히 기대했겠지만 그녀는 소파 속으로 가라앉은 몸을 끄집어내듯 일으켜 세워 조금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불면증이 있는 데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잠들지 못할 시간인데도 이상하리만치 잠이 쏟아졌다.



4

갑자기 탁, 하는 둔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깼다. 순간, 어젯밤에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선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사물은 익숙한 형태로 다가오고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가게에 붙은 작은 침실이란 걸 알아챈다.

닫혀있는 코튼 레이스 커튼이 아침햇살을 부드럽게 걸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심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잠이 들면 평소보다 소리가 열 배쯤은 크게 들리는 옅은 잠귀를 지닌 그녀에게 문이 닫히는 소리는 천둥소리만큼이나 컸었다. 천천히 일어나 앉은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초점 없는 멍한 눈으로 마룻바닥에 깔아놓은 흰색 러그의 직조무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곤 기어이 알아챈다. 방안 공기의 질량이 변했다는 것을. 자신을 깨운 그 소리는 그가 나가면서 문을 닫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녀는  옆으로 쓰러지듯 다시 누웠다.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문은 다 칠해져 있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완벽한 ‘비포’의 어떤 세상이 있을 것처럼 맑은 레몬옐로우 색깔이었다. 문 위쪽에 있는 작은 격자창도 꼼꼼하게 페인팅이 되어 있었고, 유리 위에 포스트잇이 한 장 붙어있었다.


빨리 마르는 페인트긴 해도 하루 정도는 조심할 것, 모처럼 곤히 자길래 깨우지 않고 간다. 잘 지내.


그녀는 깔끔하게 색칠이 된 노란 문을 망쳐버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누르면서 조심스레 포스트잇을 떼어서 화풀이하듯 쓰레기통에 던지고 주방 쪽에 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그도 여기로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바로 옆의 침실에서 자고 있던 그녀가 문 닫는 소리를 듣고 깼을 것이다. 주차장엔 당연히 없을 줄 알았던 그의 차가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아직 그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은 아침 공기 속에서 불길한 무엇인가를 감지했다. 차를 두고 갔다는 것은 꽤 오래 돌아오지 않겠다는 암시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그녀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일지도 모른다.


그가 떠난 후, 모든 것이 놓였던 자리에서 일인치도 변하지 않은 어수선한 실내에서 그녀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함께 개업을 할 줄 알았던 그가 일주일쯤 일정을 앞당기겠다고 말했을 때 보다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마음을 바꿔 갑자기 떠난 것이 더 서운했다.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가 떠나자 그녀는 텅 빈 진공상태가 되었다. 그토록 설레며 짜놓은 계획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출입문이 노란색으로 변한 지점에서 모든 것이 지워진 것 같았다. 그 문이 가두고 있던 공간까지도 모조리 낯설어져서 그녀는 마치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모든 게 손에 잡히지 않고 심지어 서툴렀다.

 그는 자기 하나만 빠져나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에겐 그가 모든 것을 몽땅 싸들고 야반도주를 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질적이던 불면증이 사라졌다. 아니 계속 잠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날마다 쓰러지듯 잠이 들고일어나면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러다가 정 배가 고프면 마른 빵을 한쪽 씹거나 커피에 우유를 넣어 마셨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오기를 부리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희미해져 갔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는 떠난 지 사흘 만에 두 통의 문자를 보냈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 기다리지 마, (그녀에겐 기다리라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는 할 수 없어서 그가 자신을 놓치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자신으로 인해 과거가 점점 희미해지고, 현재에 뿌리를 내리는 게 두렵고 죽은 미카에게 미안해서 행복으로부터 달아나는 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젠, 추억을 과거 속에서 살게 하지 않고, 마치 여행 가방처럼 끌고 다니는 그를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없는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무엇보다도 가게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현실적이 자각이 들게 한 건 개업일이 언제인지를 물어오는 ‘레오’의 전화 덕분이었다. 사실 이 가게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라 ‘레오’라는 이탈리안인 할아버지다. 워킹비자로 캐나다에 와서 이 가게에서 6년째 일하고 있는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영주권도 레오 덕분에 받을 수 있었다. 레오는 이젠 다 정리해서 은퇴하고 밴쿠버 아일랜드로 가서 편하게 살고 싶다면서도, 그녀를 위해서 가게는 그대로 둔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유권은 그대로지만 가게 수리비용까지는 대 줄 테니 가게를 운영하고 필요한 세금이나 경비, 이윤까지도 모두 그녀가 알아서 하라고 맡긴 것이었다. 레오는 ‘네가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녀에겐 믿어지지 않는 행운이자 선물이었다. 가족도 없고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는 그녀에게 레오는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배려는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해서 표현할 방법도 모르는 고마움이었다. 비록 장사가 그리 잘 되는 가게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적자는 아니라서 열심히만 하면 큰 걱정 없이 소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론 가게를 잘 키워서 언젠가 레오가 이 가게를 처분하려고 할 때 도움이 되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전화를 끊고,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책임감’에 소홀했다는 걸 깨닫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일어나서 모든 창문과 노란 출입문을 활짝 열고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다 그가 벽화로 그리려다 만 르느와르의 화집이 아직도 펼쳐져 있는 걸 발견했다. 책장에 꽂으려고 화집을 접다 말고 그녀는 멈칫했다. 순간, 어떤 둔탁한 것에 부딪친 마음 안에 진동이 생겼다. 그건, 슬픔이었다. 하지만 충격에 비하면 그리 무겁지는 않은, 마치 꼭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깜빡 잊고 가지 못해 쓸모없어진 연극 공연의 티켓 같은 슬픔이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밝은 오렌지 빛깔의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의 보트 위에서 서로 잘 아는 듯한 다정한 남녀들이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부드러운 옷감과 밝은 피부, 따뜻한 미소와 다정한 대화들이 오가는 공간, 실제로 모두가 르느와르의 지인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림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엇갈려 있다. 전체로 보면 즐겁게 어울려 있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다. 심지어 르느와르의 애인이었던 알린노 샤리고까지 화가가 아닌 강아지와 눈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모델들이 그랬는지, 혹은 르느와르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시선 처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의도치 않은 것이겠지만, 아마 그럴 테지만, 그가 선택했던 그림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줌인되는 낯선 얼굴처럼 확 다가왔다. 그녀는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또 보았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과 눈을 맞추는 사람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미 여러 차례 봤던 이 그림을 마치 처음 보는 듯, 수천 조각의 퍼즐을 맞춰야 하는 것처럼 보고 또 보았다. 퍼즐은 끝내 맞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화집을 덮었다. 아마도 과민반응일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을 덮으며 언뜻 스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그 어떤 짐도 지우려 하지 않았던 그가 얼마나 무겁게 자신을 누르는 가벼움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첫 단어부터 오해였던 것 같다. 마치 오래 닫혀있던 낡은 서랍을 열 때처럼 덜컥,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가 마음 밑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쓸쓸하게 타전되는 말, 어쩌면 이제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



5

 그가 밴쿠버를 떠난지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두 번, 그녀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에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오랜만에 전화를 해도, 섭섭한 일이 있거나 말다툼을 한 후에도, 마치 그의 전화를 받기 위해 비상대기 하고 있는 사람처럼 두세 번이 신호음 후엔 전화를 받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치 어떤 스위치가 켜진 듯 바로 긴장이 풀리고 아늑해졌었다. 그녀가 그립다.

 어떻게 끝내고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과, 빼지 못하고 있는 결혼반지와, 마치 귀소본능처럼 미카의 집을 다녀가는 이 행위가 그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면서도 아무런 변화도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정리를 해야겠단 결심을 하느라 오히려 그녀를 더 서운하고 아프게 했을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녀에게서 어떤 변화가 감지되어서 그걸 확인할게 될까 봐 두려웠다. 예정보다 일찍, 함께 가게를 오픈하지도 못하고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것도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거나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녀에게로 갈 수 없다. 그는 이것을 그녀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 동안 그는 로키 국립공원을 돌아다녔다.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쟈스퍼에 있는 화랑에 들러서 그림을 몇 점 주고, 밴프에서는 지인의 집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화장실 바닥의 타일을 바꿔주었다. 그리고 양부모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미카의 집으로 갔다. 미카의 부모님은 환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이젠, 그를 볼 때마다 감추지 못하던 슬픔의 흔적도 희미해졌다. 딸을 잃은 슬픔을 조용히 극복하고 계신 걸 알 수 있었다. 작년보다는 훨씬 더 평온해 보이셔서 그는 마음이 좀 놓였다.

 기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의식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평소에 그와 미카의 가족들이 좋아하던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 리빙룸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몇 번이나 되풀이한 옛이야기들을 다시 불러내기엔 시간이 흘렀다는 걸 모두 공감하는 듯 별 의미 없는 일상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앉아있었다. 꽤 긴 침묵 끝에 미카의 아버님이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이젠, 기일은 그만 챙기자. 아무 때나 우릴 찾아오는 건 환영이지만 굳이 기일에 맞춰서 올 필요는 없단 뜻이야. 그 반지도 빼고. 너무 오래 슬픔에 잠겨있으면 죽은 사람도 편히 이승을 떠나지 못한단다. 이젠 보내주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분들은 늘 이랬다. 그의 마음을 세심하게 짚어내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알아서 주시곤 했다.

 미카의 방은 작년과는 다르게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어서 추억을 소환할 아무런 물건도 없었다. 마치 낯선 도시에서 묵게 된 깨끗하게 정돈된 에어비앤비 같았다. 그 방에서 그는 짧지만 단잠을 잤다. 새벽에 일어난 그는 샤워를 하고 나와 간단한 필기도구만 놓인 작은 책상 앞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반지는 잘 빠지지 않았다. 그동안 손가락이 그리 굵어진 것도 아닌데 마치 상처 위에 앉은 딱지를 떼어내는 것처럼 뻑뻑하고 화끈거렸다. 반지가 빠진 손가락엔 피부색보다 밝은 색깔로 반지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반지와 자신의 손가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욕실에서 꺼내온 작은 새 수건 위에 반지를 올려 책상 위에 두고 일어섰다. 아무리 애써도 다시 사랑이 될 수 없는 죄책감은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간단하게라도 아침을 먹고 가라는 미카 부모님과 깊은 포옹을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두 분은 번갈아가며 그의 등을 쓰다듬고 손을 잡았다.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예전만큼 자주 그를 만날 수 없으리란 것을. 하지만 비로소 찾아온 이런 순간이 고마웠다. 마치 이제서야 그에게서 온전한 자신들의 슬픔을 넘겨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음같아선 지금 당장 밴쿠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는 다시 로키로 향했다. 이젠 그가 기다릴 차례였다. 



6

카페 구석의 작은 책상 위에 펼쳐 둔 르느와르의 그림은 마치 그의 부재를 대신하는 것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그와 연락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의지를 지켜주는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변할 필요는 없지만 계속된다면 상처만 생길 뿐인 시간은 멈춰야 한다는 게 그녀의 의지였고, 그러기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와의 연락을 끊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늘 그에게 닿아있었고, 언제든 그가 저 노란 문을 밀고 들어오면 마치 잠깐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사람을 맞듯 그를 향해 환하게 웃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먼저 연락하지는 않을 결심이다. 


그의 전화를 세 번이나 놓쳤다. 전화가 올때마다 액정에 뜨는 그의 이름을 보면서도 멍하니 전화기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신호음이 끊어지면 그녀는 그의 전화를 놓친 게 안타까웠다. 자신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가 돌아오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의 전화를 또 놓치고, 그가 다시 전화해 주기를 기다렸다.


 겨울 우기가 끝나고 아직 여름이 시작되기 전의 이맘때는 가장 아름다운 환절기이기도 했다. 다시 문을 연 카페는 이전보다 바빠져서 여러모로 그녀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가 없으면 안될 것 같던 자신의 삶이 괘도수정을 하고도 그런대로 살아지는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허망했다. 매사가 극명한 양면성을 오가며 그녀 자신을 위로하거나 질책했다. 마음은 아예 다 잃어버리고 몸과 정신으로만 사는 사람같아 쓸쓸하다가도 자신이 아주 단순하고 간결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여전히 헤매는 중이었다.


 조금 분주한 시간이 지나자 카페는 텅 비었다. 사람들이 비운 자리로 햇살이 밀물처럼 모여들었다. 가구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굴절되는 햇살을 따라가던 그녀의 눈길이, 문득, 르느와르의 그림 위에서 멈춘다. 색이 바랠까 봐 햇살이 닿지 않는 곳에 두었는데 빛이 가득한 실내와 대비되는 어두운 구석에 놓여있던 그림은 마치 그동안 홀로 자라고 있었던 것처럼 좀 달라보였다.

 그녀는 눈앞에 모여있던 빛을 털어내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나 그림 쪽으로 가까이 갔다. 거기, 그림속의 사람들도 그녀도 알고있는 관계의 모든 슬픔과 기쁨이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시선은 엇갈렸지만 결코 무관심이나 미움은 아니었다. 그림이, -가끔 네가 나에게 집중하지 않았도 괜찮다고,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아끼며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 넓은 세상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모여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삶의 이유가 되지 않느냐고- 그녀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미카의 죽음을 애도한 건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깨닫는다. 그와 그녀는 같은 슬픔을 다른 방식으로 치렀을 뿐이다. 순간, 그녀의 몸 속 어디선가 저릿한 감각이 살아난다. 마치 잊었던 약속이 생각난 듯, 불연듯, 그의 목소리가 듣고싶어서 셀폰을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다가 멈춘다. 어쩌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하는 대신 아직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미련을 가만히 토닥거린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그녀에게 미련은, 가장 은밀한 희망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의 흐름은 사람마다 다르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다시 그리워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을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 그래서 시한이 정해진 ‘언제까지’가 아니라 ‘끝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어느 날 두 사람의 시간이 드디어 한 지점에서 만났을 때, 기적을 보았다고 서로에게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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