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_ 산속의 바다 _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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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현관을 들어서는데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어쩐지 꽤 오래 계속 울렸을 것 같아서 서둘러 신발을 벗다가 거의 넘어질 뻔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한국에서 온 전화란 건 알 수 있었다. 여보세요? 한 여자가 아주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아예 낯선 목소리는 아니라서 선뜻 누구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금세 알아채지 못하면 서운할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짓 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다시 한번, 여보세요?를 반복했다.
니는 음성이 그대로다야.
나는 비로소 그녀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목소리가 아니라 ‘음성’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 문장을 말했다면 분명 '목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식의 구분이긴 하지만 목소리는 구어체에 속하고 음성은 문어체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구어체에 가까운 문장을 말하면서 뜬금없이 문어체적인 단어를 쓰는 버릇이 있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9년 전에 이민 올 때, 공항의 출국 게이트 앞에서 잠깐 만나 손을 흔들어 주었던 사람,
엄마였다.
엄마도 목소리는 여전했는데 금세 알아채지 못한 것이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오랫동안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해도 딸이 엄마의 목소리를 잊을 수도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지난 팔 년 동안 이국이라는 먼 거리뒤에 숨어서 엄마를 아예 지우려고 애쓰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눈물 한 방울 없이 서울을 떠나면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 가장 먼저 그녀를 넣고 봉인했던 것도 같다.
그동안 전화나 편지도 없었고 엄마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오래된 습관처럼, 아니 반사작용처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늘 내게 불안한 존재였다.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사람이라서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눈치를 보며 화투판이 벌어진 동네의 구석방으로 찾아가 엄마가 일어날 때까지 문간에 버티고 서 있거나, 남대천 뚝방에 앉아서 밥 할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가슴 졸였던 내 어린 날들은 여전히 가장 안쓰러운 불안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내가 아무리 애들 써도 달라지는 건 없고, 그런 기다림과 불안은 계속 반복되리란 것을.
엄마의 전화는 여전히, 그게 몇 년만이든,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을 날아와야 하는 곳이든, 곧바로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하든,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내 몸속 어딘가엔 엄마만이 누를 수 있는 버튼과 연결된 경고음이 있었다.
장서방이랑 애들은 잘 있나? 나는 니는 안 보고 싶은데 장서방은 보고 싶더라.
아... 엄마는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그리고 그런 엄마에게 아직도 절망하는 나도 여전하구나. 우린 아직도 지금의 물리적인 거리보다 더 먼, 각자의 마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리는 절대로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8년 만에 통화하는 딸한테 그게 할 소리야? 딸이 보고 싶어야지 왜 사위가 보고 싶어? 설령 그렇다 해도 그냥 모두 보고 싶다고, 잘 지내냐고 하면 되지 굳이 ‘니는 안 보고 싶은데.’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야?'라고, 따지듯 묻고 싶었지만 내 대답은 간결했다.
그럼, 모두 잘 있지.
엄마의 집요한 남아선호 사상이 남편에게까지 옮겨진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단지 아들을 낳기 위해 딸을 셋이나 낳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던 엄마, 그리고 마침내 얻은 막내아들만이 엄마의 자식이었다. 엄마를 보면서 잘못된 방식으로 집착하는 어떤 생각이나 관계는 그 사람 인생의 모든 영역을 침범한다는 걸 알았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왜 딸보다 사위가 보고 싶냐고 화를 낼 자격이 없는 딸이다. 나도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엄마가 보고 싶지 않으면 나쁜 딸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보고 싶다는 감정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딸에게 선뜻 그래도 괜찮다고 이해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단지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한 인간으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것 같아서 타인에게 쉽게 말할 수 없었고, 엄마가 그리운데 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아서 슬펐다, 어쩌면 나의 모든 정신적 결핍의 원인은 엄마의 부재가 아니라 엄마가 그립지 않다는 죄책감을 숨기느라 써버린 감정의 소비 때문일 수도 있다.
통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주로 엄마가 말을 했고 나는 들었다. 나는 아직껏 남아있는 원망과 어색함을 감출 수가 없어서 말을 아꼈다. 사실은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어쩌면 엄마에 대해서 궁금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할 말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아니, 궁금하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해서 뭔가를 알면 속상하고 불안하고 신경 쓰이고 언젠가는 그 말을 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던 기억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엄마는 대관령의 어느 마을에서 식당을 한다면서 집도 물도 경치도 다 좋은 곳이니 언제고 한국에 나오면 꼭 들리라고 했다. '아저씨도 좋은 사람이야.' 엄마는 그 ‘아저씨’라는 사람이 마치 내가 잘 아는 사람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동생에게 들어서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혼 후 아버지는 이미 재혼을 했으니 엄마라고 혼자 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신혼 6개월부터 동생들을 데리고 있는 동안 아버지의 재혼을 몰랐던 것처럼, 엄마도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슬그머니 낯선 남자를 끼워 넣는 어이없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어째 우리 집은 자식들은 못하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이혼한 부모가 각자 당당하게 누리고 있을까? 그렇다고 그 낯선 두 사람을 내 인생에 넣어준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신파처럼 찾아드는 자기 연민은 어쩔 수 없다.
일급수로 판정을 받았다는 산골의 차고 맑은 물이 있고 텃밭에선 고랭지 채소들이 자라고 그 물과 야채를 쪼아 먹으며 자라는 닭을 키우며 식당을 한다는 엄마는 과거는 다 잊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높고 맑기까지 했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의 불안한 마음이 엄마의 자랑을 들으며 오히려 가라앉았다. 엄마의 말에서 이토록 무해한 단어들을 계속 들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아저씨'가 누군들 무슨 상관인가. 엄마는 굳이 내게 그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수식어를 달 필요조차 없었다. 엄마를 그곳에 붙잡아 두고 아무 특별한 사건 없이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해줄 사람이라면... 언제 한국 안 나올래? 글쎄... 그게 어디 쉽나.. 직장도 다니고.. 엄마와 어떤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민 후에 한 번도 한국에 가질 않았다. 엄마와 통화를 하는 중에도, 전화를 끊은 후에도 한국에 가야겠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건 구 년 전에 한국을 떠나면서 한 결심이기도 했고, 엄마가 이 결심을 바꿔놓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3주간의 긴 휴가를 내고 기대나 설렘도 없이 짐을 쌌다. 전날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공항으로 출발하기 몇 시간 전에 겨우 트렁크를 닫으면서도 그냥 이대로 두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3주 동안 내내 잠만 잤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