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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Dec 18. 2023

냉정한 인사

단편소설_ 산속의 바다 _ 2/3


2

 강릉에 도착한 건 늦은 저녁이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왔냐’라고 한 마디 하신 후, 아무 말씀도 없이 송정 바닷가 쪽으로 차를 돌렸다. 차가 어느 바닷가 횟집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동생이 짐짓 발랄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끌어내는데도 불구하고 꽤 불편한 침묵이 몇 번 끼어들었다. 그때마다 차 안에 고이는 어색한 기류를 피하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설렘으로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다.


 피서철이 지나 선지 저녁시간인데도 횟집은 한산했다. 계산대에 앉아있던 여자가 상술이라고 하기엔 너무 친근하고 환한 미소로 반기며 우리를 이층으로 안내했다. 아래층에 빈자리가 있는데도 바로 위층으로 안내하는 걸 보니 아버지가 즐겨 앉으시는 자리가 따로 있는 단골집 같았다. 어쩌면 식당에 가면 늘 같은 자리를 찾는 내 습관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층은 아래층보다는 조금 좁았지만, 전체가 온돌방이었고 바다 쪽으로 난 벽은 모두 유리였다. 나는 맨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두 번째 상이 있는 곳에 앉으셨다. 낮이었으면 파도가 유리벽에 이마를 대고 안을 들여다볼 만큼 바다가 가까운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다. 마치 유리벽에 두꺼운 검은색 종이를 발라 놓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모둠회에 추가로 몇 가지를 더 넣어달라는 주문을 하셨다. 곧이어 한 상 가득 차려지는 반찬들은 깔끔하고 종류도 많아서 회를 빼고 먹어도 부족함이 없는 저녁상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시장기가 느껴졌다. 아니, 시장기라기보다는 호기심이었다. 이웃들에게 한국 밥상이 얼마나 화려한 ‘사이드 디쉬’를 갖춘 음식인지 여러 번 자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는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치 음식을 감정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조금씩, 모든 반찬을 먹었다. 바다와는 상관없는 뭍에서 난 재료로 만든 반찬에서도 바다냄새가 났다. 하지만 반갑고 달았던 음식들은 삼키고 나면 금세 낯설어져서,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오래된 기억을 발굴하는 기분이었다. 모든 음식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내가 맛보다는 혀에 닿는 촉감에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음식들이 마치 환자의 잃어진 기억을 불러내는 정신과 의사의 질문처럼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아주 큰 접시에 가득 담긴 회가 나왔다. 갑자기 지금까지 나를 치근거리던 자잘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건 이국적인 음식들 중에서 비로소 내가 이름을 아는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과 비슷했다. 푸르고 싱싱한 회 한 점을 집어 올리며 어쩌면 나는 살짝 설렜는지도 모른다. 불현듯,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짠 내도, 속 시원한 파도도 거의 없는 바다 근처의 도시에 살면서, 늘 그리웠던 건 거친 동해였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초고추장을 묻힌 회를 꿀꺽 삼켰다. 나는 몇 번이나 싱싱한 활어회의 담백하고 빠닥빠닥한 촉감에 감탄한다. 회는 식감이 이래야지. 

 처음엔 물컹한 식감 때문에 싫어하다가 나중엔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먹는 연어나 냉동 참치회에 점점  익숙해져서 그 맛을 꽤 즐기며 살아놓고도, 그동안 죽은 듯 숨어 있던 오래된 미각은 간사하게도 기억을 배신한다. 어쩌면 내가 거짓말을 하면서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맛있다고, 괜찮다고, 견딜만하다고, 다 잊었다고.


너, 어릴 때부터 회 좋아했는데 많이 먹어라.


 아버지는 여전히 취기가 오르지 않으면 말씀이 짧았다. 너무 많아서 남길 것 같던 회를 다 먹고도 아직 배가 고픈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접시 바닥에 깔았던 깔깔한 무채까지 두어 번 집어 먹었다. 무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는 어릴 때부터 늘 고민이었다. 회 밑에 깔려있는 무채를 먹어도 되는지.. 하지만 아무에게도 묻진 않았다. 먹으면 안 된다고 대답하면 그걸 탐했던 게 무안할 것 같아서였다. 나는 부끄러움을 잘 견디지 못하는 아이였다. 마지막에 나온 매운탕은 지금까지의 모든 맛을 평정할 만큼 진하고 맛있었다. 하얀 쌀밥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배가 부르진 않았다.

 혹시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신체가 아닌 감정의 포만감을 기대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허리를 뒤로 젖힐 만큼 무거워진 배를 끌어안고도 배가 부르지 않다고 억지를 부리는 걸까? 먹은 음식으로 보면 당연히 느껴야 할 포만감 대신 체기와는 구분되는 답답함 때문에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함께 나눠 먹던 사람들이거나 혹은, 그저 까마득한 어떤 시절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 건, 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는 동생의 살가운 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 내 엄마가 살아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 호칭으로 불릴만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그녀가 원하는 호칭으로는 불러 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아버지가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아픈 기억을 접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까 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벽 쪽으로 자꾸 눈길을 돌렸다. 어둠은 야속하게도 유리벽에 납작 엎드린 채 내 시선을 모른 척했다. 그때 갑자기 검은 유리벽에 푸른빛의 균열이 생겨 흠칫 놀랐다.

 서치라이트였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주변의 공기가 잠깐 가벼워졌다 이내 어둠은 더 깊어진다. 꼬리연처럼 길게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나타난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호명하는 건 희디흰 파도만이 아니다. 없는 듯 웅크리고 있던 내 오래된 기억들도 덩달아 일어섰다. 너무 오래 가슴속을 떠돌아 집이 없는 기억들은 놀란 듯 몸을 일으키다 다시 꼬꾸라졌다. 파도의 결이 유난히 어지러운 밤이었다

 동생은 더없이 다정하게 그녀와 소주잔을 기울여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마치 오래 숨긴 비밀을 들킬까 봐 긴장한 사람처럼 고개를 조금 숙이고 남은 반찬들을 뒤적거렸다. 내가 거짓말을 했었구나... 가까이 있는 너라도 잘하라고...  하지만 이런 느낌이 내가 비웠던 세월임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햇수를 나타내는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오래, 멀리, 혹은 너무 깊게, 나는 떠나 있었던 것 같다.

 익숙했던 풍경들이 사라지거나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했다. 그들은 가지치기를 하듯 기억의 군더더기를 쳐내며 잘 살고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조차 낯설 만큼 변하고도 지난 아픔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건 나뿐인지도 모른다.



3

어젯밤에 회를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아침부터 또 무슨 오징어회야?


톤이 높은 편인 그녀의 말에 대꾸도 없이 아버지는 주방 쪽으로 가셨다. 오랜 습관대로 운동을 나가신 줄 알았던 아버지는 새벽 수산시장에 가서 오징어 회를 사 오셨다. 밤새 집어등 불빛 아래로 모여들다 잡혀서 육지로 올라온 새벽 오징어는 흰빛보다는 푸른 형광빛에 가깝다. 나는 그 빛깔을 기억한다. 그 빳빳하고 푸르도록 흰 오징어회를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는 아침밥은 참 오랜만이었다.

아주 오래전 휴일 아침이면, 자주 오징어회를 먹었다. 밤새 오징어 잡이를 마친 배들이 들어오면 작은 어촌의 아낙들은 싱싱한 오징어를 고무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시내에 있는 주택가로 팔러 왔었다. 물 좋은 것을 고를 필요도 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들어 올려도 아직 검푸른 밤바다의 기억을 살갗에 묻히고 있는 오징어를 사고, 굵은 채를 썰 듯 회를 치고,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을 만들어서 늦은 아침 식탁을 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평소에는 부엌일을 전혀 하지 않으시지만 고기를 굽거나 이렇게 오징어 회를 치는 것 같은 특별식은 아버지 담당이었다. 아버지는 초고추장을 만드실 때면 늘 콜라를 조금 넣으시면서 이게 맛을 내는 비법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만든 초고추장은 내 입맛에 딱 맞아서 초장을 먹으려고 오징어회를 먹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넌 어째 그 많고 많은 맛있는 회 중에서 제일 맛없는 오징어회를 좋아하냐. 초장 너무 많이 찍으면 속 쓰릴텐데...

 매번 비슷하게 나무라시면서도 아버지가 그 시간을 즐기셨다는 걸 알고 있다. 그때 나는, 유난히 길었던 흰 목덜미에 닿는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는 중학생이었는데 아버지의 말씀이 바로 삶의 규칙이 되는 순한 딸이었다. 아버지는 좀 어렵다 싶은 말귀도 제법 잘 알아들을 듣는 첫 딸을 앉혀놓고 이런저런 조언을 하시며 흐뭇해하셨다. 감정의 표현에 인색한 편인 아버지의 표정에서 그런 것들을 알아채던 눈치 빠른 나는,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딸, 아버지의 자랑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마주 앉아있는 우리는 그때의 그 사람들이 아니다. 아버지도 내가 믿었던 것처럼 살지 않으셨고, 나도 아버지의 기대처럼 살지 못했다. 아무리 십여 년 만에 만났다 하더라도 이토록 사라지지 않는 서먹함은 무엇 때문일까? 적당한 시기에 화해하지 못한 실망이나 아픔은 결국 흉터로 남는 걸까?


 냉장고 안에 있던 반찬이 다 나온 것 같은 아침상을 받고도 오징어회 한 가지만으로 밥을 먹었다. 아침상을 물린 후 동생과 설거지를 하고 거실로 갔더니 작은 방 베란다로 나가셨던 아버지는 제법 큰 꾸러미를 가지고 나오셨다.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시다 정년퇴직하신 아버지는 소일 삼아 아파트 근처에 있는 작은 텃밭을 가꾸는데 재밌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동생과 내게 주려고 고춧가루를 덜어내 작은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이게 다 태양초로 만든 고춧가루야. 내가 지난가을 내내 고추 말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어디 놀러 갔다가도 날씨가 꾸물거리면 얼른 먼저 들어왔다니까, 글쎄! 요새 믿을만한 좋은 고춧가루가 어디 흔하나? 김치 담그면 맛있다고 다들 달라고 난리야. 그래도 아까워서 아무도 안 줬지. 우리 김장할 때 모자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딸네랑 같이 하거든.


 자리를 뜨지 않고 아버지 곁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속이 좁아지는 나는, 내 몫이라는 고춧가루 봉지가 커질수록 불편했다. 괜히 구차하단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까지 원망스러웠다.


그러게요. 이거 말리시느라 힘드셨겠어요. 아버지, 전 안 주셔도 돼요. 그 먼 곳까지 무슨 고춧가루를 가져가요. 거기도 고춧가루 있어요. 정말 연탄 빼곤 없는 거 없이 다 있다니까요.


쓸데없는 소리 한다!


여태 아무 말씀 없으시던 아버지의 짐짓 성난듯한 말투에서 내 속내를 들켰다는 걸 알았다. 다시 거절하면 더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 묵묵히 있었더니 내 표정을 본 동생이 슬쩍 옆구리를 찔렀다.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그냥 가져가. 정말 맛있어’ 그리곤 괜히 멋쩍은지 얼른 아버지 곁으로 가더니 아끼지 말고 푹푹 담으시라고, 자기를 더 많이 줘야 한다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아무래도 한국에서의 내 시간은 9년 전으로 멈춰 있나 보다. 동생이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고춧가루를 빌미 삼아서 아직 날이 무뎌지지 않은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정당화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혼인 내가 동생들을 데리고 사는 동안 아버지는 우리 몰래 재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동생들의 생활비를 보내주고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셨다. 엄마가 아버지 몰래 보증을 서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으니 아버지가 재혼을 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재혼을 했는데도 내가 왜 동생들을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논이나 부탁도 없었고, 아버지의 새 시계와 반지를 보고 내가 스스로, 그것도 뒤늦게 눈치를 채게 했다는 것에 묘한 배신감을 느꼈고,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게 그녀는, 끝까지 단지 '아버지의 여자'일 뿐이다.


 미리 정해놓은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아버지가 꼼꼼하게 묶어주시는 고춧가루를 받아 가방에 넣는 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우린 집을 나섰다. 고춧가루가 보태진 작은 가방은 불룩했다. 그 불룩한 가방이 보기 싫고 무거웠다. 8년이란 세월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짐짓 가볍게 스쳐가고 싶었던 내 속셈을 놀리는 것 같아서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올라가서 고춧가루 봉지를 꺼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가방을 끌어안고 차에 올랐다. 가방이 집채만큼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묵묵히 운전을 하시는 아버지의 옆모습도 착잡해 보인건 단지 내 느낌, 혹은 바람이었을까? 말한 적은 없지만 아버진 알고 계시리라. 내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를.

                                              

 시외버스 터미널로 곧장 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차는 해안도로를 달려서 경포 해수욕장에 닿았다. 피서철이 지난 바닷가 주차장엔 해풍과 사람들의 발자국이 날라다 놓은 모래알이 옅은 서리처럼 까칠하게 깔려있었다. 차문을 열자마자 와락 안겨오는 비릿한 짠내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옛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잠겨있던 여러 개의 감정들이 고리가 풀린 듯 유순해졌다. 한국에 두고 온 것 중에 언제나 가장 그리운 건 이 바다였다. 아버진 알고 계셨을까. 내가 이 바다에서 당신이 주신 목숨을 버리고 싶던 겨울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 불에 그슬린 쌀에서 나는 화근내 같은 희망도 있다는 걸 가르치며 등 뒤의 도시로 나를 돌려세워 보낸 것이 이 바다라는 것을. 

바다와 마주 앉았다. 아주 먼 길을 걸어와서 더는 서 있을 힘도 없는 사람처럼 철퍼덕 주저앉았다. 어릴 때, 오리바위, 십리바위라고 불렀던 작은 섬 같은 바위들이 언제 저렇게 뭍 가까이 다가온 걸까. 내가 볼품없이 덩치만 커버린 것 같아 민망했다. 하지만 바다는 여전했다. 여전히 충만했고, 나는 여전히 외로웠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줄 알았던 동생이 보이지 않아서 모래알을 털며 일어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주차장과 말끔하게 새로 지은 화장실 옆의 소나무 숲 아래에 서서 뭔가를 먹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그들 뒤에는 빛이 바랜 푸른 파라솔이 꽂혀 있는 손수레가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손수레 위에는 커다란 알루미늄 솥이 놓여있고 그 속엔 폭폭 한 김을 내는 다슬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동생이 먹고 있던 다슬기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 번도 다슬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갈비를 뜯거나 게살을 파먹거나 쪽, 소리가 나도록 다슬기를 빨아먹는 따위를 잘하지 못했다. 어려서는 입맛이 짧고 좀 수고스럽게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성격이라 그랬는데, 음식을 먹기 위해 뼈를 바르고 살을 파내고 물어뜯는 따위의 행위가 삶의 의욕을 넘어선 집착처럼 느껴진 건 스무 살부터였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런 음식들을 깔끔하게 먹어치우지 못하고 망설인다.

세 사람이 작은 핀으로 다슬기를 파먹고 꽁무니를 소리가 나도록 빨면서 각자의 작은 종이컵을 비우는 동안, 나는 해송들 사이로 들어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많은 것이, 아니 거의 모든 것이 변한 풍경 속에서 그래도 여전한 건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먼발치에서 바라본 바다는 어딘가 뭉근해 보였다. 바다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내가 한 겹 씩 나이를 접으며 세상을 살아내는 동안 바다도 한 겹 씩 파도를 접으며 내가 두고 간 세월을 대신 건너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맛있어?

응, 언니. 근데 이걸 뭐 맛으로 먹나. 파먹는 재미로 먹지.

쪼끄매서 품값도 안 나오겠다. 


동생이 큰 소리로 웃자 아버지도 입만 버렸다시며 웃으셨다. 


맛있잖아요! 당신은 잘 먹고서 딴 소리 하드라. 

하두 좋아하니까 같이 먹어준 거지 저게 뭔 맛이나 있나? 파먹기 성가시기도 하고.


아버지도 변하셨다. 한 번이라도 그런 적 있으셨을까? 귀찮고 싫은데 엄마를 위해서, 엄마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을 하거나 함께 음식을 먹어준 적이…. 아마 없을 것이다. 

버스 터미널을 향해 가는 동안,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던가, 이렇게 오랜만에 그 먼 데서 왔는데 하루쯤 더 있다 가면 안 되겠냐라던가, 평범한 부모라면 한 번쯤 할만한 말을, 아버지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 안의 그 누구도 그런 말을 기대하지 않았다. 각자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 길어지는 걸 아무도 원하지 않았으리라. 모두들 내 다음 행선지를 알고 있었지만 마치 그곳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이름이 없어서 말을 할 수가 없는 곳인 것처럼 모른 척했다. 


강릉 시외버스 터미널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께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 보이니 여기서 그냥 내리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차를 세웠고 나는 혹시라도 아버지의 마음이 변해서 내가 표를 끊는 곳까지 따라오실까 봐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슬픔과는 다른 고통을 준다. 그냥 이 정도의 이별이 적당하다.

 나는 마치 금방 돌아올 사람처럼, 명절 때 시댁 눈치를 보며 잠깐 친정에 들렀다가 해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절대로 무거워서는 안 되는 순간이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아무도 지난 상처를 잊지 않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더는 지나간 것들로 아픔을 타지 말자는 무언의 약속이기도 했다. 

조금쯤 쑥스러워하며 용서나 화해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나는 냉정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사람이 냉정해질 수 있다는 것은, 쏟아낼 만큼 쏟아내고 위험 수위에서 벗어난 ‘댐’ 같은 것이다. 내가, ‘냉정’이란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에서 벗어난 것은 용암처럼 들끓던 감정의 상처들이 지쳐 떨어져 나간 후였다. 그것은 치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게서 떨. 어. 져. 나갔다. 앓을 만큼 앓고 난 후의 감정은 다른 이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 냉정은 이제 위악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건강하세요. 언젠가 또 뵙겠지요. 어쨌든 지금 아버지의 곁에 머무는 사람은 그녀라는 사실 앞에서 나는 아무런 원망이나 슬픔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오히려 아버지가 낯설어 보였다. 그녀가 우리들의 세계로 들어와 우리를 몰아낸 게 아니라 아버지가 우리들의 세계를 떠난 것이다. 이젠 내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차례란 걸 알았다. 긴 계단을 오르면서도 뒤꿈치가 가벼웠다. 흉하게 불룩해진 가방 따위도 이젠 신경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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