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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l 06. 2022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생의 드라마는 언제나 무게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짐이 누구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고들 말한다. 사람은 그 짐을 지고 갈 수 있기도 하고 혹은 지고 갈 수 없기도 하다. 짐의 무게에 쓰러지고, 그것에 대항해서 싸우고, 지거나 이기거나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무 일도. 그녀는 한 남자를 떠났다. 그를 떠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를 박해했던가? 그가 보복을 했던가? 아니.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다. 사비나의 어깨 위에 떨어진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page 154)                                      

                                                                                                                  

아직도 익숙한 제목인데 책 뒤의 발행 날짜는 1991년 5월 20일, 까마득하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책 속의 섬세한 표현들은 거의 잊었지만 그때 왜 이 책을 골랐는지는 기억한다. 제목 때문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마도 그때 내 존재가 너무나 하찮고 막막해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혼자 거리를 헤매다 눈에 띄는 서점에 들어갔고, 두 시간쯤 책들 사이를 흘러 다니다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마치 용한 점쟁이를 만나 복채를 내는 기분으로 사천 오백 원을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서둘렀을 것이다. 그리고 배고픈 아이의 식탐처럼 읽었을 것이다.


존재의 무게는커녕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그때, 내가 느끼는 존재의 가벼움은 환경의 무거움에 대한 반항일 뿐이란 것도 모른 채, 그래서 이 은밀하고 서늘한 책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읽어 치웠을 것이다. 식은 밥을 물에 말아먹어치우듯.


이제 다시 이 책을 읽는다.

책 읽은 속도가 빠른 편이지만 내 습관적인 속도가 무시당하는 느리고 꼼꼼하게 읽히는 책이 좋다. 이 책이 그렇다. 가끔씩 책에서 물러나 마음먹은 만큼 가벼워질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속수무책으로 무거웠던 이십 대의 내 가벼움에게 가소롭지만 어쩔 수 없이 부러운, 연민의 눈길을 던진다.


자신의 무게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인가를

사랑에 대한 내 해석이 첫 줄부터 오해였다는 것을

그때

내가

알았더라면.


천천히, 조금씩 다시 읽는다. 너무 오랜만에 읽었더니 거의 처음 읽는 책이나 마찬가지다. 더러 오독이었고, 많은 부분을 아예 잊었다는 걸 알았다. 의도하지 않은 시간의 분리가 만드는 낡은 새로움을 좋아한다. 그런 새로움을 감지할 때면 나 자신이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아니 달라진 것 같아 덜 지겨운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가? 그가 나보다 어느 다른 누구를 더 사랑했는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는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들.... 사랑을 문제 삼고, 사랑을 측정하고 탐사하며, 사랑을 조사해 보고 심문하는 이들 질문은 모두가 사랑이 이미 싹도 트기 전에 그것을 질식시켜 버린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가능한 말이다. 바로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받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무 요구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로 다가가 그의 현존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사랑을) 바라기 때문이다.  (page363)        


너무나 많은 것들을 무거운 척 가볍게, 가벼운 척 무겁게, 중얼거리는 책이다. 마지막 역자 후기까지 다 읽고 나니 책장 끝을 누렇게 먹어 들어온 늙어 죽은 햇살의 흔적만큼이나 마음이 먹먹하다. 읽는 동안엔 뭔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슬프다. 

테레사가, 토마스가, 사비나가, 프란츠가,

허락도 없이 벌써,

내 삶 속으로 들어와 살고 있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제야 새삼스럽게 다시, 사비나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절실히 깨닫는다. 

내 삶에 그 어떤 짐도 지우려 하지 않는 - 내가 간절히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존제란 얼마나 나를 무겁게 누르는 가벼움인가.


책을 책장에 꽂고 돌아서는데 마음 어딘가 먼 곳으로부터 쓸쓸하게 타전되는 말. 

이제,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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