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_ 행복의 충격
잠실 교보문고에서 친구에게 선물할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김화영 산문집 '행복의 충격'을 샀다. 책을 잡으면 중간에 멈추거나 다른 책에 눈길 주지 않고 계속 읽는 편인데 딱 두 번 그러지 못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과 이 책, 행복의 충격.
꽤 오랜 세월, 감쪽같이 잊고 있던 무더위와 습기에 지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새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독한 내면과 정반대의 허울이 얼마나 절묘하게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종류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골방 같은 여름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분명 한 단어처럼 취급해야 할 '행복의 충격'이란 제목에서 행복은 짚히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충격만 지친 여름밤의 나방처럼 불길한 가루를 뿌리며 떠다녔다.
삼십여 년이 넘도록 스테디셀러라는 책 속엔 아름다운 문장들이 마치 파도에 연마된 조약돌처럼 깔려 있는데도 내가 보태야 할 공감은 사소한 짜증을 냈다. 어려운 책도 아닌데 같은 문장을 거듭 읽는 일이 빈번했다. 제법 닮은꼴의 사유와 만만할 정도로 익숙한 리듬의 문장이 오히려 방해가 되나 싶을 무렵, 어쩌면 이 책은 지중해에 관한 그의 표현처럼,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읽지 말아야 할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알아챈다. 아,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구나.
짐을 꾸리다 말고 스무 장쯤 남은 책을 마저 읽어치우려고 열었다가 그냥 덮는다. 전압이 달라 한국에서만 쓸 수 있는 전동 칫솔과 헤어드라이어, 메모 공책, 상비약, 침대 시트 한 장,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두꺼운 유리로 된 상패, 목욕용품 등등과 함께 싸서 동생에게 택배로 보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한국에 다시 와서 맡겨놓은 가방을 열고 소지품들을 꺼내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마저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바로 '지금'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늘 타이밍에 서툰 행복을 막연한 미래의 희망으로 남겨두는 삶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복한, 그 누구로 인해서 행복과 불행이 갈라 서는 게 아니라 나 자신만으로 오롯이 행복한, 그런 사람이고 싶다.
어제 우연히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정용주)'라는 책에서 발췌한 한 문장을 만났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은 게 진짜 행복이다.'처음엔 꽤 매력적으로 읽혔는데 감정이입이 되는 순간, 이 말이 너무 구차하게 느껴져서 얼른 '매력적'을 취소하기로 한다. 마치 독한 주문에 걸리기 전에 빠져나가려는 듯이.
나는 '진짜 행복'까진 바라지 않겠다. 다른 건 몰라도 행복만은, 삶이란 이름으로 연마가 좀 덜 된 원석 같은 '그냥 행복'을 만나고 싶다. 이 또한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사소한 표식이겠지만 말이다.
요즘은 '사랑'처럼 '행복'의 의미나 해석도 달라지고 있다. 이것들을 아주 짧은 동안의 화학적인 반응 정도로 취급한다. 나름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해석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동의하진 않는다. 과학적이라는 표현은 좀 과장해서 인간을 아메바같은 단세포 동물로 만든다. 인간의 감정은 신체구조만큼이나 복잡하다. 행복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결국엔 인간의 가장 세밀하고 소중한 감정 중 하나로, 영원한 화두로 남을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