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내 앞에서 울었다. 굴곡 없었던 삶이 자신을 순진하게 만들었다는 말끝에 먹구름이 고이다가 더는 짙어지지 못하고 결국 비가 되었다. 주고받으며 함께하였던 시간이, 정情들이, 한恨으로 변해 가슴이 너무 아프다, 울어서 미안하다며 어정쩡한 나를 배려하였지만, 그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들어주어야 하지만, 침묵할 수 없는 위로를 한답시고 나는 이따금 한숨을 쉬다가 술을 마셨다. 한! 이 불가항력적인 사태를, 이 사랑을, 어쩌나, 어쩌나. 비가 그치지 않는다.
“마음이든 자리에 그리움이 쌓이듯, 애정이 든 자리에 애증이 쌓인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게 사랑인가 보다. 꿋꿋하게 기다리면 다시 돌아올 거라는 막연함이 의지가 되고,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라도 손을 놓고 싶은 무모한 기다림을 시간이 해결할 거라.”는 내 강짜 같은 위로는 순진한 그이를 더욱 순진하게 만들었나 보다. 나는 어렴풋한 말들을 되새김하며 술만 마셨다. 꽃이 핀 자리에 낙엽이 쌓이면 봄이 보이지 않아도 봄은 온다, 이 말은 끝내 하지 못하였다. 당연히 못할 수밖에.
자신은 온 정성을 쏟았다고 했다. 나는, 안다 했다. 나쁜 새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하였다. 나쁜 새끼, 맞다고 했다. 다시는 사랑 같은 건 안한다, 하지 마라 했다. 그이가 울었다. 그래, 울어라. 술잔이 부딪치고 혀가 말려들었다. 소주보다 쓴 한탄이 목줄기를 훑는다.
이별 후에 마시는 술은 언어보다 명확하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한 사람에게서 오고 세상의 모든 이별도 한 사람에게서 온다. 그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다. 전부를 가지지만 전부를 잃어버리는 게 또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일부를 전부로 착각하게 만드는, 알면서도 속아야 하는, 눈 뜬 장님처럼 너를 더듬어야 했다는 것을, 나도 당하였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애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中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은 강물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엄경의 구절이 있다. 상반되는 것은 없다. 모든 계기는 연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별은 만남의 반대편에 있는 눈물이 아니라 사랑과 나란히 걸어가는 슬픔인 것을, 엄마한테서 아기가 나오듯이, 아기에게서 울음이 터지듯이, 울음이 또 다른 생을 피어 올리듯.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랑은 하늘이 내신 것이라고 그이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하늘은 믿지 않지만 시인은 믿는 나의 당부가 그이에게 가 닿기를…. 부디 사랑이 끝나고 눈물이 시작되기를, 그 눈물자리에 또 하나의 사랑이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