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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락 Mar 11. 2020

격투의 추억

산문

격투의 추억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손에 들린 아버지의 소주병이 날아가고 이모부가 그곳으로 달려든 사태는.


전모는 이렇다. 아버지는 홀아비다. 막내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풍비박산 난  아버지의 인생사는 나의 가정사이기도 했다. 광부이셨던 아버지는 늘 회한에 젖었고 술에 젖어 있다. 그런 아버지를 위로한답시고 이모부 소주와 김치쪼가리 조합의 단출한 세트를 손수 봉다리에 담아 집을 찾는 일이 잦다.  


WBC 라이트 플라이급 권투선수 장정구가 챔피언 도전을 이틀 앞둔 1983년 3월이었다. 세계 챔피언 도전에 대한 이야기로 들뜬 두 어른의 대화가 무르익자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이모부는 서서히 홀아비의 고독을 안타까워하며 위로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실 홀아비 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반듯한 가정을 가진 이모부의 일방적인 위로는 지나간 사실을 복기하는 지루한 과거사 들추기에 불과했다. 위로는 서서히 패배를 인정하라는 승자의 여유로 변했다. 연신 따라주는 이모부의 술잔이 불편했는지 아버지는 열패감에 쌓여 병나발을 불기 시작다. 생각해 보라. 생의 위로를 받는 처지에 처한 사람은  같은 처지의 사람의 말 외에는 듣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자신도 위로할 수 있으니까.


그 저녁에 나는 계몽사에서 출판된 세계어린이명작동화 50권 중 2권 「호머 이야기」-당시엔 호메로스를 호머라 했다-를 읽고 또 읽고 재탕하고 있었다. 특히 아킬레우스와 핵토르의 대결 이야기는 천 번 정도 보아서 당장 내 손에 창이라도 쥐어주면 누구라도 단번에 꺼꾸러뜨릴 수 있는 용사가 되어 있었다. 또한 나는 사건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기억할 수 있는 목격자의 눈을 가진, 문무를 겸비한 새나라의 어린이였다. 믿어달라. 어쨌든 간에 내 창이, 아니 아킬레우스의 창이 핵토르의 목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아버지  손에 들린 소주병이 번쩍, 섬광을 발하며 이모부의 이마를 명중했다. 퍽.


여기서 잠깐,  르네상스의 종결자 미켈란로의 작품, 천지창조를 들따보자.


미켈란젤로/천지창조, 1508-12년 作

손가락 들기도 귀찮아서 무릎에 살짝 올려놓은 채 세상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손주 왼손 검지 손톱을 살살 긁어주는 할아버지 손주의  정겨운 장면-진흙으로 빚은 아담에게 신이 생기를 불어넣는- 눈 앞에서 펼쳐졌다. 딱 아버지이모부였다. 


퍽, 소주병이 이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느닷없는 공격에 당황한 노장 노련함을 잃지 않았다. 이모부는 후회하지 않을 저돌적 판단력을 소유한 백전노장이었다. 10초 정도의 얼빠진 표정으로 상대를 방심시킨 후 곧바로 반격했다. 아버지의 중심으로 돌진하며 낭심을 틀어 쥔 것이다. 쏜살같은 역습에 아버지가 천지창조의 아담처럼 나자빠져지자  매가 먹이 낚아채듯 이모부의 손아귀가 약점을 거머쥐다. 이게 이게 죽을라고, 어린놈이, 쒹쒹,  입에 문 것을 절대 놓지 않는 야생의 들개처럼  이모부는 맹렬하게 아래로만 아래로만 파고들었다. 야아, 씨발, 이거 안 놔, 놔, 놔, 야야. 고함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전세뒤집고픈 아버지의 기세는 일분을 넘지 못했다. 아이고, 꺽꺽, 나 죽네, 나 죽네, 꺽꺽,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이고, 씨발. 


물고 늘어지는 동물성과 제발  살려달라는 인간성. 윽박비명이 난무하는 실전 경기였다. 피가 튀고 살점이 뜯기는 격렬한 한판을 넋이 나 체 관람하던 나는 방구석에서  드디어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끅끅.” 곧바로 전쟁터에 뛰어들어 이모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알맞은 물건을 알맞게 움켜 쥔 억센 손아귀 어린 손이 보태진다고 릴리 없었다. 아버지는 실신 직전이었다. “아빠가 죽으면 우린 어떻게 살아요. 우리 아좀 살려주세요. 엉엉, 끅끅.” 아이고, 울 아부지, 쩔꺼나, 어쩔꺼나.


울부짖는 어린양의 기도가 통했는가. 내가 몇 번을 소리치며 호소하자 이모부는 손가락을 풀었다. 상황은 종료됐다. 아버지는 숨통이 틔였는, 몇 번을 어푸, 어푸, 하가  몸을 부르르 떠시곤 시름시름하더니 10여 분 만에 코를 골으셨다. 패배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세상 편한 얼굴로 참 잘도 주무신다. 이모부는 또 어떠신가? 승자의 여유? 그런 여유 따윈 없다. 나에게 바늘과 실을 가져오라 하병에 남은 술을 푹 패인 이마에 들이부었다. 바늘에 실을 꿰어  라이터에 달군 후 거울을 보며 손수 이마 자수를 놓으신다. 역시 명장면은 에필로그에서 나오는 법, 와아, 이모부 상남자시다. 


격투의 후유증은 깔끔했다. 이틀 후, 장정구는 1차전의 패배를 설욕,  파나마의  일라리오 사파타를 3라운드 만에  KO로 꺾고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아버지와 이모부는 역시 우리 민족은 격투 유전자를 타고 난 민족이라며 애국심에 젖고 술에도 젖다. 나 권투 글러브를 손에 끼어주면 누구라도 한방에 KO 시킬 수 있는 권투선수가 되 었다. 그러나는 사건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기할 수 있는 목격자의 기억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아버지는 다시 홀아비가 되셨고 술다. 이모부는 먼 곳에서도 손에 봉다리를 들고서 누군가의 집 앞을 서성이고 계시겠지. 아버지에게 그날의 기억을 묻는다면 당신은 웃으며 추억할 수 있으실까.


소변을 누다가 아래를  본다. 몸 부르르 떤다. 이 현상을 의학적으로다가 소변 후 전율 뭐라더라. 나의 전율은 격투의 기억 탓에 중심이 오그라 들기도 해서 과하게 소변을 털 때가 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더라. 가끔 전율 끝에 느낀다. 삶이 어쩌다 지급해주는 기억은  나를 풍부하게 해주는 개런티 같지만, 속지 말라. 인생은 실전이더라. 당신의 전율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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