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전, 인터넷도 모르고 채팅도 모르던 나는 하릴없이 호기심에 동네 피시방에 앉아 ‘YAHOO’에 접속했고 굉장히 놀랐다. 이런 별천지! 내가 알고 있던 4대 문명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황화, 인더스)가 아닌 또 다른 문명이 있었다니…. 나도 모르는 새 은밀히 번성하던 문명 ‘인터넷’은 나에겐 신대륙의 발견이었다. 오백여 년 전, ‘콜럼버스의 악수’에서 지금은 ‘죽음의 악수’로 명명된 아메리카 발견에 비견될 순 없지만, 어찌 됐던, 어야든동,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여인, 오래된 그리움 ‘문학’과의 악수, 아니 뜨거운 포옹은 시작됐다.
‘문학방’
채팅창 목록에서 발견한 ‘문학방’은 대륙의 금광이었다. 이곳에서 누군가가 올려 준 문학동호회 사이트로 급히 달려가서는, ‘예전 꿈을 접어야 한 문학청년이 어쩌고 저쩌고 …’두서없고들뜬자기소개를 하고 가입동의를 기다렸다.
먹고, 자고, 싸는 일이 인간사에 가장 중한 일임을 이제는 알아도 그 시기엔 뭣도 모르고 참 많이도 썼더랬다.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 밤이 깊을수록 별은 광채를 더 한다 하였나.안 먹고, 안 자고, 안 싸고, 글을 써대니 얼굴엔 주름만 깊어 눈은 늘 퀭 하였다. 옛일 같은 건, 엄마가 가출하기 전 내 손에 쥐어 준 오백 원 지폐였고, 학창시절에 나하고 따로 노는 같은 반 뒷자리 날라리 양아치들에게 뺏긴 돈이라 여겼다. 그러고 보니 내 삶이라는 게 불우함의 전형이 되어 당시의 영화에도 막 유행을 탔었는데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참 찰지게 잘도 버텼다.
지나온 삶이 겪고 만났던 상황과 상처들이 모두 글감으로 치환되어 스스로 위안받던시기였다. 감성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필명이 ‘슬픈감성’이었다나, 뭐랬다나. 일필휘지의 문장력, 군더더기 없는 어휘들, 글자 하나에 묻어나는 진정성과는 전혀 관계없는글들이 남발되고 증발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소년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의 피터 팬이요, 눈 밑이 언제나 거뭇했던 광부의 아들이요, 끝내 놓친 막내 손이 사무쳐 그 길로 집을 도망친 엄마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불효자요, 결혼 후에도 첫사랑을 못 잊어 찔찔거리는 사내외다. 별게 다 글이 되고 시가 되니 바야흐로 ‘슬픈 감성’의 시대가 도래했단 말인가.
글이라는 게 쓰면 쓸수록 묘해서 안 좋았던 일들이 좋아지고 좋았던 일들이 슬퍼지고 까맣게 잊고 살았던 이들이 불쑥 나타나서는 밤낮없이 가슴을 두드려댄다. 그리고 그리움, 그 망할 놈의 어떤 그리움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하늘만 보면 눈물이 나온다고 청승을 떨지 않나, 나한테 담뱃불을 빌린 처음 본 그 사내의 뒷모습에서 가장의 슬픔이 보인다고 하지 않나, 아내의 빤쓰는 왜 또 그렇게 빨아대는지….속옷은 본인이 빨아 입자는 생활상식의 글쓰기까지.
사랑은 어떤가. 사랑이야 말로 모든 글쟁이들의 영원한 뮤즈, 구석기시대를 지나 고전 철학의 아빠 소크라테스의 향연을 거쳐 르네상스까지. 르네상스를 거쳐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 이후 젊은 베르테르는 왜 자살을 선택하였는가? 로테가 그리 예뻤나? 뉴턴의 만유인력대로라면 사랑도 나한테만 껌딱치처럼붙어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문호들의 수많은 세레나데를 거쳐 현재까지 가슴을 쥐어짜게 하는, 물귀신보다 더 요망한 게 사랑이 아니더냐? 그 시절, 사랑 썰로 글 몇 개를 울궈 먹던 작가 ‘슬픈 감성’은 말한다. “사랑보다 글쓰기가 쉬웠어요.”그렇다 한다.
여튼 사랑에 관한 글 몇 개 중에 유난히 애착이 가는 산문이 있었다. “복사꽃 꿈을 꾸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십 분 정도 만에 정말 꿈꾸듯 쓴 글이었다. 글에 꽃이 쓰이고 꿈이 들어가니 어지간히 아련하고 질질 짰을까 싶지만은 나 보기엔 좋아서 내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이걸로 후련하여져서 아직까지 복사꽃에 관한 글이나 사진, 풍경을 보아도 두 문장이 입에서 읊조려진다.
“복사꽃 꿈을 꾸었습니다. 붉은 길의 끝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쓸래야 쓸 수 없는 이야기와 글들, 사랑에 관한 기억은 가슴에서 말라버린 지 오래고, 그때의 글쓰기처럼 기력이 왕성하지 않고, 무엇보다 감수성이 생활 전반에 꽂히는 한창의 시기였던지라 번뜩이는 의식도 내 얼굴만큼 낡아져서지난시절의 청춘을 모두 잃고 말았다. 또한 동호회 사이트 주소가 이동되면서 수십 편의 글과 시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딱 위의 두 문장만 남았다. 첫사랑 그녀는 아직도 복사꽃 같은 미소를 잃지 않았을까.‘슬픈 감성’은 여전히나인데도 세 번째 문장을 찾지 못한다.
하늘을 보면 눈물이 난다던 그 사내는 지금 어디쯤에 누워 있을까. 올봄, 붉은 길을 걷다 보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싶다.